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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이 40번째 완주, 끝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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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이 40번째 완주, 끝내줬습니다

입력
2009.03.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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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선글라스에 턱수염, 그리고 오른 주먹을 불끈 쥐는 세리머니까지. 모든 게 똑같았지만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지인들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ㆍ삼성전자)가 마라톤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니, 반환점을 돌았다. 이봉주는 15일 열린 2009서울국제마라톤 서울 세종로-잠실종합운동장간 42.195㎞ 완주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올 가을께 은퇴 경기에 나설 예정이지만 공식 대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날 전체 14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올린 기록은 2시간16분46초. 우리 나이로 불혹인 이봉주는 정확히 나이만큼 40번째 완주라는 대기록을 남기며 유니폼을 벗었다. 전세계를 통틀어 마라톤 공식대회 40번 완주는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절반인 20차례 완주도 드물다. 선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마라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이봉주는 이제 지도자로서 마라톤 중흥의 사명을 짊어질 계획이다.

■ "달릴 때 가장 행복해요"

이봉주가 그동안 훈련과 대회를 통해 뛴 거리는 약 20만㎞. 지구를 5바퀴나 돈 셈이다. 왜 그렇게 '죽도록' 뛰었을까. 이봉주는 "달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답한다. 특별히 돈 들 것도 없이 그저 달리면 되기 때문에 시작한 마라톤이었다. 이봉주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을 빛나게 해준 마라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고통의 순간도 없지 않았다. 동갑내기 황영조(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몬주익의 영웅'으로 떠오른 1992년, 이봉주는 부상으로 올림픽 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포기의 유혹이 밀려왔지만, 운명 같은 마라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4년 뒤 애틀랜타 올림픽. 이봉주는 조시아 투과니(남아공)에 불과 3초 뒤지며 2시간12분39초로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악전고투에 대한 꿀맛 같은 보상이었다. 평발에 짝발,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의 충청도 청년은 이때부터 한국 마라톤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 오뚝이 인생

스무 살이던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 풀코스를 뛴 이봉주는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로 탄탄대로를 달릴 듯했지만, 곧 시련을 맞았다. 99년 소속팀 코오롱이 사실상 해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봉주는 후배 김이용의 포상금 문제로 팀과 갈등을 빚었고, 끝내 다른 주축 선수들과 함께 짐을 쌌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그 해 10월 중순부터 오인환 코치(현 삼성전자 감독)와 함께 충남 보령의 여관을 전전했다.

그렇게 소속팀도 없이 출전한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이봉주는 기적처럼 한국기록(2시간7분20초)을 세웠다. 이봉주는 "만약 그때 실패했다면 운동화를 벗었을지도 모른다. 대회를 마치고 오 코치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평생 그렇게 많이 울기는 처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위에 그친 이봉주는 이듬해 마라톤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2001년 4월17일 세계 최고 권위의 제105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서윤복, 함기용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3번째로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는 우승 직후 국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펼치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호사다마였을까. 4개월 뒤 열린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스 도중 기권하기도 했다.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14위에 머물렀을 땐 "한계가 온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가 쏟아졌지만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8분대를 찍으며 우승해 "역시 이봉주"라는 찬사를 들었다.

■ 제2의 이봉주 탄생을 위해

마라토너로서 최적의 조건을 타고난 황영조가 단 8차례 완주에서 모든 것을 보여준 반면, 이봉주는 급경사의 굴곡을 오롯이 견뎌낸 '뚝배기'다. 쌍꺼풀 수술을 하고 모발 이식으로 단점을 감추는 '보통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봉주에게는 소위 '안티'가 없다. '국민 마라토너'라는 별명도 그 때문에 붙여졌다.

어머니 공옥희(75)씨에 대한 극진한 마음 씀씀이로 한때 CF를 통해 "엄니, 나 이쁘주"라는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천성이 착해 손해만 보고 살 것 같은 그의 쉼 없는 질주에 국민들은 웃고 또 울었다.

이제 이봉주는 후배 지도를 위해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그는 15일 레이스를 마친 뒤 "아쉬움도 많지만 마음은 후련하다. 홀가분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어 "국민들의 많은 관심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다.

앞으로는 후배 양성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올해 하반기 미주 유학 여부를 결정한 뒤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 계획이다.

이봉주가 2000년 세운 한국기록은 10년 가까이 깨지지 않고 있다. 이제 그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기록을 깨기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선다. 비록 트랙을 떠나지만,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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