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빛 바랜 흑백사진 한 장쯤 간직하고 있을 추억의 장소 간이역. 그 중에서도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 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간이역들이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간이역 23곳 중 무인역 6곳이 관리는 커녕 아예 폐쇄되어 버린 것으로 취재결과 확인됐다.
사라지는 간이역을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던 애초의 취지는 온데 간데 없었다. 소유자인 코레일이나 지자체는 예산부족을 핑계로 손을 놓았고 관리 감독을 해야 할 문화재청은 이러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번창했던 석탄산업의 추억을 지닌 경북 문경의 가은역. 그 첫 인상은 문화재라기보다 폐가에 더 가까웠다. 깨진 창문너머 대합실 바닥에는 각종 고철과 공사 장비가 널려 있고 개찰구는 아예 각목으로 못질이 되어 있었다.
주민 조용재(73)씨는 "쓰러져가는 간이역을 지날 때면 폐광과 함께 몰락한 우리 일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며 한숨 지었다. 문경시는 그러나 예산이 없어 휴양단지 조성이 끝나는 내년 말까지 이대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대구시 동구의 동촌역도 사정이 비슷했다. 외벽은 온통 낙서로 어지럽혀져 있고 역사 곳곳이 불에 그을려 있는데도 소화기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대구 반야월역과 전남 순천의 원창역, 전북 익산의 춘포역도 창호가 모두 널빤지로 막혀 있었다. 닳고닳은 매표구나 빛 바랜 운행시간표 등 간이역의 은근한 추억거리는 이 곳에서 '관람불가'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경기 남양주의 팔당역은 바깥에 이중으로 철망을 설치해 외부인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역사를 가까이서 보려면 미리 공문을 보내든지 일명 '개 구멍'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원창역과 춘포역은 문화재임을 증명하는 동판마저 떨어져 나간 지 오래고 특히 현존하는 최고(最古)역사 춘포역에서는 보호용 가림막도 설치되지 않은 채 복선화 공사가 한창이었다. 코레일 측은 역사 관리에 대해 "최소한의 현상유지만 할 뿐 수익도 없는 건물을 따로 관리하기에는 예산상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런데도 문화재청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뒤늦게 실태파악에 나선 문화재청 관계자는 "등록문화재의 경우 소유자에게 관리를 강제할 수 없다. 스스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는 "문화재를 수익창출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문제" 라며 "획기적인 예산확충과 사회적 인식확립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간이역은 물론 400여 건의 등록문화재가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글=박서강 기자 pindropp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