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ㆍ이연택 지음/해누리 발행ㆍ288쪽ㆍ1만원
"새어머니는 걸핏하면 돈 얘기를 꺼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넉넉하지 못한 것은 다 나혜석 그년의 탓'이란 말을 여러 차례 들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생모의 이름이 나혜석인 줄 몰랐다."(36쪽)
나혜석(1896~1949)에게는 '조선 최초'니 '여류'니 하는 말이 흡착판을 댄 듯 붙어 다닌다. 그런 수식어의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나혜석이 타계한 지 올해로 꼭 60년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혜석을 기억하는 진짜 이유는 1930년대에 벌어진 '조선 최초의 스캔들'에 대한 관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관심이 그의 핏줄로 하여금 긴 세월 어머니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혜석의 둘째 아들 김진(83) 전 서울대 교수가 60년 만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나혜석과 관련해 숱한 이야기를 했다. 고증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본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어처구니없는 왜곡을 일삼았다… 공통점은 나혜석 사건의 다른 주인공 김우영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로 인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그 상처로 일생을 휘청거리며 산 아버지의 모습을 난 잊을 수 없다. 내 이야기의 출발 동기다."
이 책의 시점은 독특하다. 저자가 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임에도 가족 에세이의 폐쇄적 틀과 거리가 있다. 더러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호칭도 나오지만 대부분 호칭을 생략한 '나혜석', '김우영'이라는 주어로 문장이 시작된다. 되도록 거리를 두고 나혜석의 삶을 그리기 위한 의도다.
저자는 직접 보고 듣지 못한 부분을 기술하기 위해 픽션을 넣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와 누나의 기억도 제한적이고 그나마 가물거린다. 이야기 연결을 위해 가명과 가설을 사용한 것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다"라고 솔직히 밝힌다. 기자 출신 공저자인 이연택씨의 문장과 상상력이 김씨의 이런 의도를 도왔다.
저자가 기억하는 나혜석, 그의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다. "그녀는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나혜석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절제를 꼽는다. 그녀에겐 뭐든지 마음에 생기는 것이나 사고하는 것을 터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질이 있다… 만일 나혜석이 속내를 감수하고 차기의 기회를 별렀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픈 말을 다 내쏟은 나혜석은 화단의 이단아로 낙인찍힌다."(44쪽)
자신과 형제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아버지를 평생 자포자기적 행동에 갇혀 살게 만들었던 "나혜석 그녀"에 대한 저자의 심정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간단히 몇 줄에 담을 방법이 없다. 끓는 애증 속으로 소용돌이치는 저자의 복잡한 감정은 아버지 김우용에 대한 묘사로 에둘러 표현된다. "여전히 나혜석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그가 뿜어낸 예술가적 향내와 인간적 매력에 대한 그리움 사이에서 괴롭게 갈등하는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듯, 달래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37쪽)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저자의 어투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띤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의 생모가 나혜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그에 대한 화가 오랫동안 축적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비참한 말년을 상상해보면 가슴이 아프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했지만, 어느 누군들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284쪽)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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