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한적함을 찾는 게 새로운 여행 트렌드 중 하나라면 제주의 문화예술을 찾아 마음을 살찌우는 것도 또 다른 제주여행 방법이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제주는 문화예술의 불모지'란 오명을 벗게 하는 고급 문화지대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화가 국악인 서예가 조각가 작가 등 내로라 하는 문화인들이 한데 모여 사는 예술인촌의 모습이 점차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처음 이 예술촌이 계획된 건 1999년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기 전 당시 북제주군에서 9만9,000㎡의 땅에 48필지의 택지를 개발했고 전국의 문화예술인들을 대상으로 분양해 이뤄낸 마을이다.
현재 이곳에는 서예가 조수호, 서양화가 박광진 등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2명을 비롯해 박서보(서양화), 조종숙(서예), 양의숙(목공예), 김경수(시사만화), 박석원(조각), 안숙선 명창 등 20여 명이 나름의 개성을 살린 건물을 짓고 입주해 있다.
경기 파주의 헤이리가 개인이 구상해 관련 인사들에 분양한 곳이라면, 제주 저지리는 지자체가 나서 차려 놓은 예술인 마을이다.
저지예술인마을 투어의 중심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제주현대미술관이다. 2007년에 문을 연 이 건물은 외양부터 독특하다. 각목 크기로 가늘고 길게 자른 현무암이 건물 외관을 감싸고 있다. 그늘진 곳에는 현무암 외벽에 파란 이끼가 돋았다. 건물이 오래되면 미술관은 푸른 빛이 완연해질 것이다.
미술관 내부는 특별전시실, 기획전시실, 상설전시관 등으로 나뉘어 있다. 미술관의 핵심은 입구에서 바로 만나는 김흥수 특별전시실이다. 국내 대표적 원로 화가 김흥수의 작품 20여점을 영구 기증받아 상설 전시하는 공간이다.
제주현대미술관 김창우 관장은 "김 화백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는 곳은 전국에 여기밖에 없다"며 "작품 가치를 환산하면 100억원도 넘을 것"이라고 했다.
추상과 구상을 융합한 김 화백의 하모니즘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김 관장은 "김 화백의 그림을 보기 위해 일부러 서울서 여러 번 찾아오는 분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한 블록 떨어진 제주현대미술관 분관에선 또 한 명의 원로 화가 박광진의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다. 박 화백이 이곳에 기증한 149점의 작품들을 전시 일정에 맞춰 교체 전시하는 공간이다. 억새 유채 등 제주의 풍경을 그만의 시각으로 담아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본관의 기획전시실에선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변관식 이응노 이상범 서세옥 송수남 등의 소중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그린 귀중한 '묵란도'도 전시실 벽면 한 곳에서 힘차게 난을 치고 있다. 미술관 바로 옆에는 야외 상설 공연장과 야외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미술관을 둘러싸고 있는 예술인마을 택지에 현재 완공된 건물은 21동. 예술인들의 작업 공간으로, 작품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곳들이다.
화산재인 송이로 바닥을 깐 마을 길을 거닐며 그들이 꾸며 놓은, 그 자체로 예술성을 지닌 집들을 구경하고, 개인의 작은 전시관에서 맘껏 문화의 향을 느껴볼 수 있다. 혹시나 그들 중 누군가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해주거나, 길에서 만났을 때 반갑게 맞아준다면 더욱 즐거운 일이다.
예술인마을에는 '방림원'이란 야생화 전시관도 둥지를 틀고 있다. 20여년 야생화를 연구해온 방한숙씨가 전 세계에서 가져온 야생화 2,500여종과 고사리 등 양치식물 300여종, 수생식물 200여종이 전시돼 있다.
저지리 인근엔 저지오름이란 아름다운 오름이 있다. 제주 전통가옥인 샛집을 엮는 새(억새)를 이곳에서 많이 거뒀다고 해서 '새오름'이란 이름도 함께 가지고 있는 오름이다.
이 오름의 자랑거리는 울창한 숲과 그 숲을 안내하는 숲길이다. 2007년 생명의숲 국민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이곳을 선정했다.
숲길은 저지리 마을 뒤편에서 오른다. 숲길은 중턱에서 오름을 한 바퀴 돌아 오르고 정상에서 굼부리(분화구)를 따라 또 한 바퀴 돈다. 삼나무 소나무 닥나무들로 빽빽한 숲길은 사철 푸름을 뿜어내는 초록 정령의 공간이다.
제주현대미술관 입장료는 1,000원. www. jejumuseum.go.kr (064)710-6601, 방림원 입장료는 5,000원. www. banglimwon.com (064)773-0090
제주=글·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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