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 '헌혈의 집'. 짧은 머리의 두 젊은이가 피를 뽑기 위해 침상에 나란히 누웠다. 긴장할 법도 한데 부풀어 오르는 헌혈 주머니를 보며 오히려 싱글벙글이다. "난 오늘 56번째야.""친구야, 기다려. 내가 곧 따라잡을 테니까."
헌혈을 위한 경쟁 아닌 경쟁에 나선 이들 열혈 청년들은 학군 45기 동기생인 육군 66사단 포병연대 이현진(26) 중위와 수도방위사령부 1113야전공병단 이충현(26) 중위다.
이들의 헌혈 행진은 피가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아찔하다. 헌혈을 처음 시작한 2005년 3월부터 4년 동안 이현진 중위가 56회, 이충현 중위가 35회로, 둘이 합쳐서 91회. 각각 매달 한번 꼴로 피를 뽑은 셈이다.
"헌혈 뒤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산 책은 머리에도 쏙쏙 들어온다"고 익살을 떠는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헌혈족.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가도 광화문이나 강남역 등에서 '헌혈의 집'이 보이면 불쑥 들어가기 일쑤다. 현진씨는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헌혈하는 걸 싫어해 결국 헤어졌는데, 지금 여자친구는 다 이해한다"고 말했다.
2007년 3월 임관 후 광주 상무대에서 4개월간 고된 장교 훈련을 받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2주에 한번씩 나오는 금쪽 같은 외박 시간에 짬을 내 '헌혈의 집'을 찾았다. "고기, 자장면, 햄버거 등을 다 참았죠. 헌혈 직전 육식은 피하는 게 좋거든요."(이현진), "우리가 운동선수도 아닌데 음식까지 조절하며 헌혈한다며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나요."(이충현)
이들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혈소판 헌혈도 수시로 해왔다. 또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골수기증 서약까지 했다. 골수는 백혈병, 혈액암 환자에게는 '생명 샘'이지만, 1주일 정도의 입원과 휴식을 필요로 해 골수기증 서약자가 아직은 16만여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임관을 앞둔 2006년 10월 충현씨가 "기억에 남을 헌혈을 하자"고 제안해 골수기증을 결심했다. "저희 유전자와 맞는 환자가 나타나면 당장 달려 가야죠. 골수기증 5분 대기조입니다." 둘은 힘줘 말했다.
2005년 두 친구가 단짝으로 어울리던 경기대 학군단 후보생 시절, "젊었을 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헌혈의 계기였다. 각종 봉사단체를 찾아 다니던 중 우연히 서울 광화문의 통학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헌혈의 집'을 발견한 것이 이들의 헌혈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참 신기했어요. 매일 가는 곳이었는데 그날 따라 '헌혈의 집'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이지 않겠어요. 이거다 싶었죠." 현진씨는 첫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각각 경기 안양과 가평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요즘 안부 인사는 이렇다. "이번 달에 헌혈했어?" "우리 휴가 맞춰서 헌혈하자." 인터뷰 말미에 두 청년은 "젊은 혈기라는 말은 우리보고 하는 말 아닌가요?"라며 밝게 웃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