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15일(월요일) 미국 5위권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간판을 내리게 된 것은 리먼 만이 아니었다. 100년 전통의 세계 금융중심, 월스트리트의 명성과 권위도 함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앞서 3월 IB 베어스턴스가 몰락하면서 불길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지만, 시장에는 '미국이라면 이 정도 위기는 단시간에 잠재울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리먼의 파산은 이런 신뢰가 붕괴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금융기관의 부도를 넘어 '믿음' 자체가 부도남으로써 전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세계 금융시장 '올스톱'
리먼 파산 다음날인 9월 16일 세계증시는 9ㆍ11테러 이래 최대폭락을 기록했다. 전세계 6,000억달러어치 주식이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의 엄청난 부실이 드러났고,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는 IB에서 상업은행(CB)로 탈바꿈했다. 씨티,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상업은행(CB)도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으면서 사실상 '국유화'과정을 밟는 처지가 됐다.
미국 다우지수는 리먼 파산 20여 일만에 1만선이 무너진 이후 날개 없는 추락 끝에 현재 6,500대로 주저 앉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증시도 날개를 잃은 채 끝없는 추락을 거듭했고, 일본 니케이지수도 26년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 9일 "금융위기 확산으로 전세계적으로 약 50조달러가 넘는 금융자산 가치가 증발했다"고 발표했다.
세계 금융기관 간에 달러조달이 힘들어지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가 외환위기설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아이슬란드 등 몇 나라는 10여년 전 한국처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됐다. 지금은 동유럽 국가들이 집단적 디폴트 상태로 몰리고 있다.
실물위기 심화
금융의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기업과 가계 등 실물분야로 전염된다.
시장에서 돈을 조달할 길이 막힌 기업들은 잇따라 부도위기에 직면했다. 우선 미국의 빅3 자동차업체 중 GM과 크라이슬러조차 부도위기에 몰려 정부지원에 기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가 됐다. 미국의 유력 전자유통업체인 서킷시티가 간판을 내리는 등 미국업계는 생사기로로 치닫고 있다.
개인들의 구매력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주택이 압류돼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 역시 급증하는 추세다. 세계은행은 최근 전세계 교역량이 80년 만에 최대 하락할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내놨다. 내수는 물론 무역에서도 수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세계경제가 회복되는 시점에 대한 전망도 점차 비관적으로 변하고 있다. 작년만 해도 올 상반기에 저점을 찍고 1~2%대 플러스 성장을 할 거란 전망이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마이너스 성장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현 금융위기를 예견해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9일 "세계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 있고, 미국 경기침체는 극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36개월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위기가 세계재편 부르나
전세계는 세계 주요국간 위기극복을 위한 공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미국, 유럽, 일본 중심의 소수 선진국이 주도하는 양상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협상테이블이 G7(선진7개국)에서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대거 포함된 G20(주요20개국)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 지난달 23일 서울서 열린 글로벌코리아 2009 행사에서 강연자로 나선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G20이 세계경제의 운영위원회가 될 수 있고, 이것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유일한 밝은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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