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SKY(서울대ㆍ연세대ㆍ고려대)'진학률이 높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의 A재수종합학원. 수업 시작 5분 전인데도 각 강의실을 꽉 채운 학생들은 책상에 붙어 앉아 수업 준비에 바빴다. 누구 하나 잡담을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치열한 경쟁과 무거운 분위기 등이 답답할 법도 한데, 학생들은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 학원을 택했다고 말했다.
이 학원의 올해 모집정원은 1,500명이었으나, 무려 8,000여명이 지원했다. 학원측도 놀랐다. "제발 받아달라"는 학생과 학부모들 성화에 기존 26개 반에다 오후반 8개를 추가해 2,000명을 받았다. 학원 관계자는 "경기침체 여파로 중위권을 비롯해 전체 재수생 수는 15~20% 정도 줄었지만 수능 1,2점 차이로 소위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재수를 택했다"고 말했다. 점수 위주의 대학입시 덕에 'SKY'진학률 높은 유명 학원들만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초ㆍ중ㆍ고 학생, 학부모 5만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2008 사교육 의식조사'에는 점수 위주 대학입시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응답자들은 사교육 증가의 원인으로 ▦기업 채용시 출신대학 중시 ▦심각한 대학 서열화 ▦대학의 성적우수학생 선발경쟁 ▦주요대학의 수능ㆍ논술 위주 선발을 차례로 들었다. 그동안 수능이나 학력고사 '점수'가 대학 순위를 매기는 기준이 돼왔음을 감안하면, 결국 대학입시 점수 경쟁이 망국적 사교육 열풍의 진원지라는 결론이다.
정부가 2009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수능을 점수제로 환원한 뒤 상황은 더 악화했다. 정부는 점수 경쟁을 누그러뜨려 사교육을 줄인다는 취지로 2008학년도 대학입시에서 1~9등급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대학들의 입시 전형에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르지 않아 진학 지도에 혼란만 초래한다는 비난에 부딪친 것. 결국 정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주요 대학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적 우수 전형을 쏟아내고 있다. 올해 입시부터 선보인 수능 우선선발전형을 2010학년도에도 이어갈 태세다. 연세대의 경우 정시 일반전형에서 수능 성적만으로 정원의 70%를 뽑기로 했다. 수능 성적이 낮으면 정시 지원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다. 고려대도 마찬가지다. 정시에서 수능 성적 100%를 반영해 정원의 30%를 선발할 예정이다. 한양대 성균관대 이화여대와 서강대(수능 우선선발 60%) 등도 정시모집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추려낼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이런 입시 구조에서 점수 올려주는 사교육을 받지 않고선 'SKY'진학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수생 박모(19ㆍ여)씨는 "요즘 상위권 학생들의 수능 목표는 무조건 영역별 100점"이라며 "점수제는 1점에서 당락이 갈리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점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서울대 진학에 실패한 재수생 유모(20)씨는 "상위권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1점의 노예'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라고 전했다.
결국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사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지방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경북 구미에서 상경해 재수학원에 다니고 있는 김모(18)군은 고교 내내 반에서 2,3등을 유지했다. 그러나 수도권 지역 학생들과의 경쟁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는데다, 수능 시험까지 망쳐 정시 지원을 아예 포기했다. 김군은 학원비 59만원에 고시원비, 식비 등을 합쳐 월 150만원을 쓴다. 김군은 "재수하는 친구들 대부분 서울 학원을 다닌다"면서 "경제형편이 좋지 않은 부모님께 부담을 드려 너무 죄송하지만, 철저히 학벌중심인 우리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내년 입시부터 각 대학들이 입학사정관제 전형 도입을 확대할 예정이지만, 여전히 대입의 중심은 수능 성적이다. 2010학년도 입시에서 전국 50여개 대학이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선발하는 인원은 5,000여명에 불과하다. 전국 4년제 대학 정원 32만여명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50만명이 넘는 수험생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벽인 동시에 수능 점수따기에 진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려대 진학을 희망하는 서울 숙명여고 3년 김모(18)양은 "입학사정관제 전형은 제한된 학생들만 혜택을 받게 되는 제도"라며 "현재 고3 수험생들에게 잠재력이나 소질, 리더십 등을 운운하는 것은 한가한 얘기"라고 말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대학의 점수 위주 선발 전형이 완화되지 않는 한 입시학원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규모는 더욱 커지고, 상위권 학생들의 재수 양산 현상이 반복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仄吩낮?경기침체가 장기화 할 경우 점수 경쟁에 매몰된 대학 입시 제도가 사회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수는 "공부를 잘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점수 위주의 대입 제도는 치명적"이라며 "이 경우 재수라는 '패자부활전'참여도 어려워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된 대학들
사교육의 블랙홀은 대학 입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문대 입학이다.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국제중이나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사교육에 매달리는 이유도 명문대 진학 목적이 가장 크다.
정부도 사교육의 상당 부분이 결국에는 주요 대학 진학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고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사교육 경감 대책 추진을 하고 있지만, 주요 대학들은 이를 비웃고 있다.
10여년이 가깝도록 대학들은 점수 위주 선발을 고집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는 고려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일부 사립대가 본고사에 가까운 논술고사를 치른 사실을 적발, 많게는 연간 수십 억원씩 배정하던 재정 지원을 삭감하거나 BK(두뇌한국)21사업 선정시 불이익을 주는 채찍을 가했다. 대학 총장들을 불러 놓고 "대입 3불(본고사ㆍ고교등급제ㆍ기여입학제 금지) 정책 위반시 행ㆍ재정 제재 수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협박'도 했지만 대학들은 뒷전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장기적으로 학생 선발권을 100% 대학에 맡기는 대입 자율화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나 '성적 지상주의 선발' 관행은 여전하다.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사립대학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만 골라 뽑는 '수능 우선선발 전형'을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상당수 대학들이 점수 위주 선발 전형을 잇따라 선보였다. 수능의 경우 구조적으로 사교육 효과가 클 수밖에 없어 수능 대비 사교육은 범람했다.
특히 연세대와 성균관대는 2012학년도부터 본고사형 대학별 고사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전공 분야에 따라 수학 과학 등 특정 과목 시험을 따로 보겠다는 것이다. 고려대는 대입 자율화 첫해인 2009학년도 대입 수시2학기 모집 1단계전형에서 내신 5~6등급 외국어고 출신은 합격시키고 1~2등급 일반고생은 떨어뜨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체 심의까지 받기도 했다. 수능 성적이 상대적으로 좋은 외고 출신들을 선호해서다.
전문가들은 주요 대학들이 성적 위주의 비뚤어진 입시안을 고집하는 한 대입 자율화는 요원할 것이라고 꼬집고 있다. 백순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입 자율화의 목적은 점수 대신 재능과 잠재력 위주의 선발로 공교육을 살리고 사교육비를 줄이며 교육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라며 "대학들이 점수를 학생 선발의 최대 잣대로 삼는 다면 사교육은 창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이 교육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무성에 소홀한 채 '멋대로 입시안'을 고집할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강희경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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