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경기 화성시 기산동 경기도기술학교. 교정 곳곳은 전날 새로 맞은 새내기들이 내뿜는 열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컴퓨터시스템학과에 입학한 이성(26)씨의 표정에도 생기가 넘쳤다.
"여기선 학력이나 경력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모두 똑같이 새 출발선에 섰으니까요. 누가 얼마나 열정을 갖고 학업에 정진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는 거죠."
지방의 국립대 공대생인 이씨는 지난해 8월 군 제대 후 복학을 미루고 이곳에 왔다. 선배들이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해 도서관을 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현재는 휴학 상태인 대학은 곧 자퇴할 예정이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잘 다니던 학교를 왜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느냐고 극구 반대하셨죠. 어른들은 아직도 화이트 칼라 직업을 선호하시잖아요." 이씨는 A4용지 15장 분량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나의 15년 계획서'를 작성했다.
게을렀던 과거에 대한 반성, 심각한 경제난과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앞으로 도전할 기술 분야와 자격증 시험일정, 입사 계획, 심지어 언제 결혼할 것인지까지 빼곡히 담아낸 그의 열정에 부모님도 마음을 돌렸다.
"'계획서에 쓴 만큼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라며 웃어 주시더라구요. 절 믿어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꼭 프로그래밍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될 겁니다."
올해 경기도기술학교의 새내기들은 조금 특별하다. 신입생 319명 가운데 17.6%인 56명이 대졸 학력자다. 지난해(8.7%)의 2배를 넘는 수치다. 전문대 졸업자(53명), 대학 중퇴자(36명)까지 합하면 절반 가까운 45.5%에 달한다.
학교측은 당초 1년 과정 200명을 포함해 270명을 선발할 계획이었는데, 우수한 인력이 대거 몰리자 선발 인원을 319명까지 늘렸다.
고학력자들이 갈수록 기술학교에 몰리는 것은 최근 극심한 불황으로 취업난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기술학교는 여전히 높은 취업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에서 운영하는 경기도기술학교는 수강료와 교재비, 실습비 등 교육비는 물론, 구내식당 식사 및 기숙사 이용료까지 전액 무료다. 한 달에 20만원씩 훈련수당도 받고, 국가 기술자격시험 응시료까지 대준다.
첨단기계, 전기에너지, 특수용접, 컴퓨터시스템, 자동차정비 등 5개 학과로 이뤄진 1년 정규과정과 2ㆍ3ㆍ6개월의 단기취업교육과정을 운영하는데, 정규과정 교육생의 경우 취업률이 매년 90%를 웃돈다.
김진섭 교육운영팀장은 "경기침체로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을 휴학하고 다시 기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불안한 일자리를 전전하다 인생 항로를 바꾼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첨단기계학과에 입학한 임희성(33)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2004년 지방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소규모 건축그래픽회사에 입사해 100만원 안팎의 박봉을 받으며 일했다.
하지만 그 해 5월 회사가 정부의 불법 소프트웨어 일제 단속에 적발돼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 받고 휘청거리다 파산했다. 한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다 2007년 말 어렵게 회사에 들어갔으나 경제난이 닥쳐 임금체불이 계속되자, 새 출발을 다짐하게 됐다.
컴퓨터시스템학과의 박정아(23ㆍ여)씨도 전문대를 휴학하고 일하던 자동차부품업체가 지난해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박씨는 복학을 고민하다 '일본 진출 창업'이라는 당찬 꿈을 안고 기술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박씨는 올해 전자기기기능사, PC정비사 등 6개 자격증에 도전할 계획이고, 일본 창업 꿈을 이루기 위해 틈틈이 일본어 공부에도 매달려야 한다. 그는 "쉽지는 않겠지만…"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굳은 각오가 묻어났다.
"올 한 해를 '제2의 고3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미친 듯이 뛸 거에요. 제가 일본에서 창업해 성공하면 꼭 다시 취재하러 와 주세요. 우리 회사 홍보도 할 겸 말이에요."
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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