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공개석상에 나온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47)씨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단발 머리에 검은 색 점퍼와 바지 차림의 김씨는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씨 가족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눈물도 글썽거렸다. 하지만 폭파 조작 의혹을 해명할 때는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얘기는 피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라는 말까지 하며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년이 흘렀지만 북한식 억양은 그대로였다.
11일 오전 11시께 부산 벡스코 2층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김씨는 1987년 폭파 사건 직후 '미모의 테러리스트'라는 평을 들었던 외모 그대로였다. 그 사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눈가의 주름을 빼고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이었다.
김씨는 회견장에 들어서자마자 다구치씨 가족에게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여 인사했다. 북한에서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다구치(한국명 이은혜)씨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씨에겐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고, 다구치씨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씨를 껴안고 손을 꼭 붙잡은 채 "엄마하고 닮았다"고 위로했다.
이어 이들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1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회견장 주변에는 검색대가 설치됐고, 경찰특공대와 경찰 경비 병력이 물샐 틈 없는 경호를 펼쳤다.
낮 12시30분께부터 30분 가량 진행된 기자회견에는 인원 제한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한일 기자단이 몰려 관심을 과시했다.
_왜 다구치씨 가족을 만났나.
"TV에서 다구치씨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고 언젠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_97년 결혼 이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왔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결혼을 하고 사실은 사회와는 거리를 둔 채 살려고 했다. 폭파사건 사망자와 유족들의 아픈 마음도 헤아려 주기 위해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다."
_최근 언론 인터뷰와 공개 편지 등에서 "참여정부가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는데.
"다 알다시피 지난 정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그렇다. 지금 국가정보원이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해 그 결과를 지금 기다리고 있다."(김씨는 지난해 11월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에게 보낸 편지에서 "참여정부 때인 2003년 국정원 등이 자신에게 방송에 출연, 'KAL기 폭파를 북한 지시로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고백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TV 출연 요청은 "KAL기 폭파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는 답변을 해 달라는 뜻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작년 말부터 내부 진상조사에 착수했으나 현재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_KAL기 폭파 사건에 대해 각종 의혹이 여전한데.
"일부 유족들이 아직까지 그런 의혹을 얘기하는데 20년이나 지난 사건을 아직도 누가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은 북한이 한 테러이고 나는 더 이상 가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_납치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본 정부가 북한의 자존심을 살려 주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좀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북한에선 죽은 사람이 살아 있기도 하니까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그런 좋은 일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다."
_북한에 요청할 부분은.
"북한도 그들이 그리 원하던 테러지원국 해제도 됐으니 이제 납치 희생자들이 그냥 죽었다라고만 주장하지 말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도록하거나 최소한 가족이 만날 수 있게는 해 줘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북일 관계 개선이나 북한이 국제사회 일원이 될 때 이익이 될 것이다."
_다구치씨는 어떤 상황이었나.
"87년 1월 마카오에서 돌아와 1월부터 10월까지 초대소 생활을 하면서 들은 것은 그냥 '다구치씨를 어디로 데려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망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어디 다른 곳에 갔다고 생각했다."
부산=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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