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여,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전시한다고? 그게 뭔 소리여!"
예술쟁이들이 예술을 한답시고 기어이 '시장 속으로' 들어오던 날, 시장 사람들의 반응은 까칠했다.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 이문을 남겨야 하는 장사꾼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죽어 가는 재래시장에서 무슨 예술을 한다고 이 난리람.' 예술보다 셈에 더 밝은 그들이 이처럼 마땅찮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물며 가난한 예술인들이 아예 빈 점포를 빌려 작업실을 만들고 장터에 눌러 앉겠다고 했을 때,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암튼 예술헌다는 사람들은 벨라도(별나도) 참말로 벨라(별나)당께."
6일 오후 광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동구 대인시장. 남문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떡방앗간과 쌀집, 건어물가게 등 점포 사이 사이에 들어선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인 스튜디오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금속공예가, 설치미술작가 등이 "쇠락한 시장을 살리고 일반인과 예술인 사이 소통의 길도 뚫겠다"며 빈 점포를 얻어 작업실과 전시장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시장통을 오가던 사람들이 스튜디오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나름의 비평과 소감을 쏟아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시장에 새롭게 생겨난 풍경이다.
한국화가 윤남웅씨의 작품이 걸린 작업실을 밖에서 둘러보던 주부 이현숙(52)씨는 "시장에서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과 작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갤러리 같은 곳에서 예술을 음미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고 시장 안에서 예술적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맛도 있어 종종 찾는다"고 말했다.
예술인들이 이 곳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당시 광주비엔날레가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시장 내 빈 점포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복덕방 프로젝트'를 마련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일부 작가들이 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점포를 임대해 눌러앉은 것이 계기가 됐다. 현재 시장에 입주한 작가는 모두 24명. 이 달 말까지 20명이 더 입주할 예정이다.
시장 안에 '예술인촌'이 형성되면서 침체에 빠져 있던 시장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때 "장사도 안돼 죽겠는데 예술이 다 뭐냐"며 눈을 흘기던 상인들도 "작가 선생님들 덕분에 시장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고 반겼다.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는 홍영숙(47ㆍ여)는 "앞집에서 북카페를 하는 판화작가에게 작품 만들 때 쓰라고 줄 것"이라며 커튼 등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들을 정성스레 모으고 있었다.
그는 "사람구경 하기 힘들었던 시장에 작가들이 입주한 후 작품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시장도 활기를 되찾고 있어 나도 작가들을 위해 뭔가 베풀고 싶었다"며 "작가들이 시장만 살려준다면 천 조각이 아니라 가게라도 (전시공간으로) 내주겠다"고 말했다.
떡방앗간을 하는 박종래(65)씨도 거들었다. "작품 구경 온 사람들이 하다못해 국수 한 그릇을 먹든지 반찬을 사가든지 그럽디다. 긍게 시장에 와서 그냥은 안 간다는 말이제라."
상인들은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의 복덕방 프로젝트를 통해 상권 부활 효과를 경험한 터라 입주 작가들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김홍기 대인시장상가번영회장은 "시장에서 비엔날레가 진행되면서부터 손님이 늘어 일부 분식집과 횟집의 경우 매상이 30~40% 올랐다"며 "이제는 상인들이 입주 작가들에게 좀더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해달라고 재촉할 정도"라고 전했다.
상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챈 입주 작가들도 시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삐끼'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대학 강의와 현장 실습을 하는가 하면, 쇼핑과 식사도 가급적 시장에서 해결하고 있다.
정육점이 있던 점포를 공방으로 꾸민 금속공예가 조수진(41ㆍ여)씨는 "사소한 것이지만 지인들과의 만남도 웬만하면 시장 안에서 갖는 등 시장과 상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래시장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 시장 살리기 가능성을 엿본 광주시는 대인시장을 문화특구로 조성하기 위한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했다.
시장 내 빈 점포를 활용해 예술 창작과 전시, 판매, 공연이 가능한 '예술인 공방거리' 조성하고, 입주 작가 육성 프로그램인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21일부터는 매주 토요일마다 입주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ㆍ판매하는 '아트마켓'을 상설 운영하고 각종 편의시설도 확충해 시장을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하겠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 총감독인 박성현(46)씨는 "이번 프로젝트는 시장의 빈 점포와 공간을 단지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서민들 삶과의 소통을 통해 시장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라며 "특히 재래시장이 안고 있는 경제적 문제를 예술로 진단하고 그 대안을 찾는 작업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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