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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간 쓴 세계 최장 일기 정원용의 '경산일록' 완역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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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간 쓴 세계 최장 일기 정원용의 '경산일록' 완역 출간

입력
2009.03.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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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시(戌時)에 한성 남부 회현방 본가에서 태어났다. 청나라 건륭 58년이니 정종 즉위 7년이다. 사주는 계묘년 을묘월 기묘일 갑술시이다."(1783년 2월 18일ㆍ태어난 날)

"조병휘 대감이 문병을 와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불을 땔 나무도 없는 백성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시험 삼아 걸어봤는데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1873년 1월 3일ㆍ사망한 날)

■ 72년 동안 쓴 "세계 최장 일기"

조선 후기 문신 정원용(1783~1873)이 72년에 걸쳐 17책에 기록한 방대한 일기인 <경산일록(經山日綠)> 이 한글로 완역 출간됐다.

정원용은 19세 되던 1802년(순조 2년)에 과거에 급제해 죽을 때까지 72년 동안 벼슬을 한 인물이다. 1841년 우의정에 제수되고부터는 30년 가까이 재상을 지내며 조선 말기 격랑의 역사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과거 급제로 사관(史官)이 된 1802년 10월부터 죽음을 맞이한 날인 1873년 1월 3일까지 일기를 썼다.

태어나면서부터 벼슬을 시작하기까지의 일도 기억을 더듬어 기록했기 때문에 <경산일록> 은 사실상 그의 90평생 모두를 기록한 일기다. 이번에 출간된 한글 번역본은 2,500여쪽(전6권)에 이른다.

번역은 허경진(56)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가 했다. 허 교수는 "<경산일록> 은 그동안 현존하는 우리나라 일기 가운데 최장 기간(54년)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 보다 훨씬 긴 세월이 기록된 일기로, 아마 개인의 일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쓴 일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분량보다 중요한 것은 <경산일록> 이 영의정과 원상(院相)을 역임한 정원용의 일기라는 점"이라며 "혼란했던 시기 70여년 간 조정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지위에 이르며 겪었던 매일매일의 기록으로서, 조선 말기 정치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경산일록> 은 정원용의 증손자인 위당 정인보(1893~1950)가 연희대학교(연세대의 전신) 교수로 재직하던 1940년대 말 학교에 기증해 50여년 동안 국학자료실에 보관돼 왔다.

연세대에는 <경산일록> 외에도 정원용의 아들 정기세가 50년 동안 기록한 일기 15책, 손자 정범조가 39년 동안 기록한 일기 19책, 정원용의 문집인 <경산집> 과 <문헌촬요> 등 정인보가 기증한 다른 자료들도 보관 중이다.

허 교수는 "2002년 번역을 시작할 때까지 <경산일록> 은 유실됐다는 게 학계의 통론이었다"며 "이 자료를 모두 번역하면 순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조선 말의 역사에 보다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철종 즉위 과정 등 생생하게 기록

<경산일록> 중 가장 놀라운 부분은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던 시기의 일기다. 정원용은 이 때 하루에 6, 7면의 일기를 남겼는데, 한글로 번역하면 매일 원고지 30매가 넘는 양이다.

헌종의 죽음에 대한 '헌종실록'의 기록은 '약원에 명하여 윤직(차례로 숙직)하게 하였다'(命藥院輪直)는 다섯 글자뿐이다. 그러나 <경산일록> 에는 숨가빴던 이날의 기록이 소설처럼 기술돼 있다. "저녁에 약방장무관이 임금의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고 글로 알려왔다.

임금의 얼굴이 야위고 누렇게 떴으며, 통통했던 피부가 말랐다. 계부군자탕에 인삼 한 냥쭝을 달여서 들였다… 급히 일어나 주원으로 가는 길에 '대신과 각신은 입시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들어가려는 즈음 중희당에서 이미 곡성이 났다."(1849년 6월 5일)

이틀 뒤 정원용은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서울로 모셔오는 책임을 맡게 된다.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되실 분의)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도승지에게 전교를 받들고 앞장서게 했다. 감영으로 하여금 뜰 아래에다 절하는 자리를 만들게 했다. (왕이 되실 분께) 당에서 내려서서 사배례 행하기를 청하였다."(1849년 6월 7일)

허 교수는 "<경산일록> 은 드라마나 소설에서 숱하게 상상으로 묘사됐던 철종 즉위, 고종의 등극 과정 등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정원용은 외척 세도정치가 발호하던 철종ㆍ고종 시대에 안동 김씨가 아니면서도 30년 가까이 재상을 지낼 정도로 정치력과 청렴함을 인정받은 인물"이라며 "<경산일록> 은 정치사뿐 아니라 조선시대 관원이 출퇴근하는 일상 등 사대부의 생활사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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