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이 3월 정기공연으로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신데렐라'를 공연한다. 우리의 어린 무용수들이 로잔 콩쿠르 같은 국제적인 대회에서 상위 입상하는 일이 수년간 지속되더니 이제는 레퍼토리 면에서도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는가 싶어 감개무량하다.
마이요의 '신데렐라'는 전막 발레로는 국립발레단 역사상 가장 현대적인 레퍼토리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1944년에 작곡되어 수많은 안무가들이 도전했지만 마이요의 것은 1999년에 초연되었으니 말하자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고전의 반열에 근접해 있다. 이런 면모는 클래식음악계의 상황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에도 뛰어난 작곡가들은 수없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한두 번 연주되곤 사장되는 것이 보통이다.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생명력이 긴 명작으로 존재한다던 클래식음악의 일반론과는 엄청난 괴리를 보인다. 세계대전 이후에 작곡된 곡 중에 꾸준히 사랑받는 곡이 도대체 몇 개나 남았을까?
교수란 직업이 없었다면 순수하게 작곡으로 먹고 사는 음악가는 지구상에 몇 명 없을 것이란 자조적인 평가도 나온다. 반면 무용계 상황은 이보다 훨씬 낫다.
이미 19세기의 명작보다 20세기 이후에 창조된 걸작의 수가 훨씬 많아졌고 아무리 고전발레의 마리우스 프티파가 위대하다 해도 발란신, 애쉬튼, 베자르, 크랑코, 그리가로비치, 킬리안, 포사이드 등등이 뿜어내는 위력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다.
마이요의 '신데렐라'를 보자. 샤를 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 구조는 무너졌고 유리구두가 아닌 맨발의 신데렐라다. 관객들은 젊은 신데렐라보다 훨씬 육감적인 요정 대모가 신데렐라의 죽은 엄마란 설정에도 긴장하지만 점점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와 더없이 세련된 현대적 감각에 빠져들게 된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은 동화에 사용되기에는 엽기적이라는 평도 듣는데 마이요의 신선한 해석에는 완벽하게 어울린다. 왕자가 여자의 발에 집착하는 변태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어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아직도 동화 속의 위대한 왕자님을 기다릴 여자는 없을 것 같다.
꼭 '신데렐라'가 아니라도 현대 발레의 명작은 너무나 많다. 약간은 묵었어도 드라마발레의 빛나는 고전으로 불리는 존 크랑코의 '오네긴'은 올 가을 유니버설발레단이 무대에 올린다.
이런 식으로 20세기, 21세기의 발레가 점점 더 사랑을 받는 반면 클래식음악의 새로운 고전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면 다음 세대쯤엔 무용예술의 인기가 클래식음악을 압도하지 않을까 싶다. 관객으로선 부지런히 요즘의 무용 트렌드를 익혀두어야 할 일이고 음악계는 한층 분발해야 한다.
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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