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의 뇌리에는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을 것이다. 정식 이름이 마리-안 샤를로트 코르데 다르몽인 코르데는 1793년 7월 17일 파리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보다 나흘 전, 그녀는 목욕 중인 장-폴 마라를 식칼로 찔러 죽였다. 마라는 로베르피에르, 당통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위스 뇌샤텔(당시는 프로이센 령)에서 태어난 이 의사(醫師)-기자(記者) 출신 혁명가는 그 세 지도자 가운데 공포정치에 소극적이었던 지롱드파(온건파) 리더 당통보다는 물론이고, 극히 검소한 생활 속에서 맺고 끊음이 또렷해 '청렴가'(랭코?緻성仍?'Incorruptible)라 불렸던 자코뱅파(과격파) 리더 로베스피에르보다도 더 '혁명의 적들'에게 단호했다.
프랑스혁명이 오직 희망찬 무지갯빛 수레에 실려 굴러간 것은 아니다. 혁명광장에는 늘 잘린 머리가 나뒹굴었고 비릿한 피냄새가 자욱했다. 179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엿새 동안 진행된 '9월 학살' 동안 감옥에서 살해된 '혁명의 적'들만 해도 1,200여 명에 이르렀다.
혁명의 전파를 염려한 프로이센의 침공으로 국경 일부가 무너지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고, 혁명 지도자들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인민의 정의'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그 구체적 방안은 '혁명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혁명 지지자들이 재판 없이 살해하도록 놓아두는 것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숭고한 깃발은 바로 그 지지자들에게 야만스럽게 짓밟히고 피로 얼룩졌다. 질서가 회복된 뒤에도 혁명은 공안위원회의 자코뱅 과격파들이 이끄는 공포정치에 휘둘리고 있었다.
노르망디 소귀족 집안 출신인 샤를로트 코르데는 혁명의 대의를 지지했지만, 그 속도와 강도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9월학살의 책임이 마라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1793년 1월의 루이16세 처형도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겼다.
사태가 이대로 흐르도록 놓아둘 경우, 프랑스가 혁명파와 반혁명파 사이의 잔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반-혁명분자 사냥 캠페인'이 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분열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코르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과격파 지도자 마라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노르망디 도시 캉에서 사촌과 함께 살고 있던 샤를로트는 파리로 가 물어물어 마라의 집을 찾아갔고, 캉에서 모의되고 있는 지롱드파의 반혁명운동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거짓 주장함으로써 목욕 중인 마라를 면담할 수 있었다.
피부병을 앓고 있던 마라는 집무를 대개 목욕탕 안에서 보았다. 샤를로트는 지롱드파의 반-혁명분자 명단이라며 종이 몇 장을 마라에게 건넨 뒤, 마라가 그걸 읽기 시작한 순간 식칼을 빼어들어 마라의 온몸뚱어리를 찢어놓았다. 마라는 현장에서 죽었고, 샤를로트는 체포되었다.
프랑스혁명의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라 할 이 사건은 그 뒤 여러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은 마라의 동료였던 자크-루이 다비드가 사건 직후에 그린 '마라의 죽음'이다. 이 그림에선 샤를로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막 살해된 마라의 모습이 성스럽게 보인다.
이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유명한 그림은 제2제정 때인1860년 폴 자크 에메 보드리라는 화가가 그린 '샤를로트 코르데'다. 보드리의 그림에는 막 죽은 마라만이 아니라, 그를 살해한 샤를로트 코르데가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그림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냈듯, 이 그림의 주인공은 마라가 아니라 코르데다. 벽에 걸린 프랑스 지도 앞에 선 코르데의 모습은 마치 '학살-혁명'이라는 괴물을 처치한 '생명과 자유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재판정에서 코르데는 자신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으며, "10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해 1월 루이16세를 처형하기 직전, 로베스피에르가 한 말이기도 했다. 똑같은 말이 정반대 상황에서 발설된 것이다.
코르데에게 그 '10만 명'은 애매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린 시민들이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 그 '10만 명'은 절대군주의 학정 속에서 굶주려 죽은 신민들이었다.
코르데의 이 레토릭은 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군중들 앞에서 브루투스가 했다는 연설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는 "카이사르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실 이 논리는 동서고금 모든 테러리스트들의 명분이었다.
만일 코르데가 마라를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혁명의 동력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포정치는 테르미도르에든 다른 달에든 이내 반동을 겪었을 것이다. 역사의 시계추가 오직 한쪽으로만 끝없이 내닫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코르데의 마라 암살은 혁명의 열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듯 보이던 시절에도, 그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자코뱅식(式) 공포정치는 주변 국가들의 군주들에게만 공포를 준 것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혁명기의 상당수 프랑스인들에게도 공포와 혐오감을 준 것이다. 이들 공포정치의 반대자들이 꼭 반-혁명파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이 역사에서 이룬 가장 큰 업적, 곧 신분제의 폐지는 일부 귀족들과 승려들을 제외하곤 대다수 프랑스인들에게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이룬 방식, 곧 프랑스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방식엔 도리질을 치는 사람이 많았다. 코르데도 그런 사람에 속했다.
코르데가 처형된 직후에 벌어졌다고 전해지는 일화 하나는 혁명에 대한 당대 시민들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보여준다. 코르데의 목이 잘려나가자, 르그로라는 이름의 사내가 코르데의 잘려나간 머리를 집어들고 마구 따귀를 갈겨댔다. 열광적 마라 지지자였든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멍텅구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지켜보던 군중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를 눅이기 위해 공안당국은 르그로를 징역 3개월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데의 살인행위가 참수형에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 시민들도,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더 이상의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단독범이라는 코르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안당국은 그녀를 부검해 처녀성을 확인했다. 잠자리와 살인 음모를 그녀와 더불어한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처형자들의 의심과 달리 코르데는 처녀였다. 이 처녀는 잔다르크 이후 프랑스 역사에 개입했던 가장 유명한 처녀일 것이다.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적잖은 예술가들이 코르데의 삶과 죽음을 제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앞에서 언급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 같은 회화 작품 외에도, 그녀의 삶은 소설, 연극, 오페라, 대중가요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1847년 간행한 <지롱드파의 역사> 에서, 코르데를 '암살의 천사'(l'ange de l'assassinat)라고 불렀다. 모계 쪽으로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를 조상으로 둔 이 당찬 여자는 그래서 악(암살)과 선(천사)을 동시에 대표하게 되었다. 라마르틴은 존경과 연민을 담아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이 유명한 별명을 붙였다. 지롱드파의>
샤를로트 코르데는 프랑스혁명의 주체(또는 희생자) 가운데 매우 드물게 능동성을 보였던 여자다. 20세기 러시아혁명 때만 해도 수많은 여성이 활약했지만, 그보다 1백수십 년 전 프랑스혁명 때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남자와의 아무런 공모 없이 혁명의 (그릇된) 지도자를 살해한 코르데는 또 다른 혁명, 여성해방혁명의 선구자로도 볼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코르데말고 또 한 사람의 유명한(결과적으로 유명하게 된) 여자를 죽였다. 극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1748~1793)가 그 사람이다. 그녀 역시 코르데처럼 지롱드파를 지지했는데, 로베스피에르를 비방한 죄로 단두대에 머리를 들이밀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코르데처럼 '테러의 권리'도 있을 것이다.(물론 코르데의 '테러'는 '공포정치'의 '공포'에 해당하는 '테러'에 맞선 대항테러였다.)
코르데는 테러리스트였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는 압제자에 맞선 해방전사, 자유의 투사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랬고, 김구가 그랬고, 윤봉길이 그랬듯. 그들은 암살이 소명인 천사들이었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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