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는 캐슬린 시벨리우스 신임 보건장관의 지명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단에서 시벨리우스 장관 지명자를 소개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시선이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규칙적으로 왔다갔다했다.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청중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2대의 자막기를 쳐다보며 원고를 읽고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자막기는 조용히 사라졌고 그것을 본 시벨리우스 지명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오바마 대통령은 "신경 쓰지 말라"며 미소를 보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가로 유명한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사처럼 중요한 연설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발표를 할 때도 자막기를 활용한다고 뉴욕타임스가 5일 보도했다. 정치인의 자막기 이용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연설의 달인' 오바마가 거의 모든 연설에서 자막기를 읽는다는 것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자막기는 미국의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처음 사용한 뒤 대통령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은 취임사, 의회 연설 등 중요 연설에만 자막기를 보조적인 수단으로 가끔 사용했다. 반면 오바마는 기자회견의 시작 등을 알리는 일상적인 발언조차도 자막기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내무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이 열한 살 때 국립공원에서 놀던 기억이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라고 말한 것도 자막기 원고를 읽은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자막기에 의존하는 오바마의 모습이 그를 로봇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미 인터넷에는 대선 후보 시절 자막기가 없을 때 말을 더듬는 장면을 보여주는 '자막기 대통령'이라는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졌다.
자막기가 고장 날 경우 즉석 연설을 해야 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3년 의회 연설 때 자막기에 다른 원고가 올라와 7분간 즉석연설을 해야 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유엔 연설 때 자막기에 핵심 구절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알고 즉석연설을 하다 '결의'를 '대책'으로 잘못 말해 유럽이 유엔안보리 결의안 채택을 촉구하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차예지 기자 nextw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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