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본격적인 꽃놀이 시즌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국토 남쪽에는 벌써 봄이 와 있었다.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감상하노라니 옛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때를 맞춘 하얀 매화 사이로 때 이른 홍매화가 드문드문 피어 있어 눈밭에 꽃잎이 떨어진 듯 대비가 절묘했다. 꽃 구경에 넋을 잃고 서 있자니 문득 시인이 되고 싶었다. 다시 돌아온 봄볕에 마음이 벅찬데, 나는 시인이 아니어서 아름다운 말들이 터져 나오질 못했다.
생전에 매화를 아꼈기로 이름난 퇴계 이황 선생의 시 구절은 읽기만 해도 코끝에 향기가 고인다. 이른 봄, 눈앞에 펼쳐진 매화 정원을 바라만 보던 나는 욕심에 차지 않아 떨어진 꽃 송이를 찾기 시작한다. 산들 부는 바람에 송이째 떨어진 매화를 찾아 조심조심 먼지를 떨어 냉큼 입에 넣어 본다.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혀를 물들이는 매화 맛. 매화 맛을 처음 본 것은 매화차를 통해서였다. 매화를 꽃송이채로 덖어서 만든 매화차는 언제고 찻잔에 넣고 물만 부으면 나른한 봄을 선사하는 마법의 차. 매화차를 마시기 전에는 매화나무가 만들어내는 매실에만 집중했을 뿐, 꽃 자체는 그저 관상용으로만 생각했었다.
매화차를 마시면서 매화가 피를 맑게 해준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일까, 괜히 무기력하고 지친듯 기력이 부치는 날 매화차를 마시면 노폐물이 제거되는 듯 몸이 가벼워진다. 효능을 알고 차를 마시면 기분만으로도 더 몸이 좋아지는 것 같다.
차 마시기 위해 말린 매화를 한 줌 유리병에 넣고 매화주를 담가본다. 꽃잎을 절이기에는 과실주용 막술이 드셀 것 같아, 20도 이내의 일반 소주를 붓고 보름 넘게 막아 두면, 벌써 술 빛이 노리끼리 변한다.
매실주만큼 달고 시고가 확 와 닿지 않고, 그저 은은한 빛에 은은한 향기가 맴도는 술이 만들어진다. 평소 일반 소주에 녹차나 오이채를 넣어 해독 효과를 노리는 주당들이라면 반겨줄 맛의 술.
■ 매화전, 매실주
옛날 사람들처럼 봄맞이 화전을 부쳐 보았다. 한 번 활짝 피었다가 나무가 떨어낸 매화를 주워, 찹쌀가루에 더운 물 더해가며 익반죽한 반죽에 올렸다. 겉은 흰 빛을 유지하면서 속까지 고루 익어야 하니 은근히 손이 가는 음식.
찰떡 한 면에 매화를 똑똑 얹고, 달궈진 기름을 뒤집개에 묻혀 지그시 꽃을 눌러 익힌다. 꿀을 곁들여도 좋고, 설탕과 물을 같은 양으로 끓여 만든 투명한 시럽을 뿌려도 반들반들 예쁘다.
여기에 매화차나 녹차를 곁들여도 좋겠고, 나처럼 작년에 담근 매실주가 있다면 그와 함께 상에 내도 어울리겠다. 초여름 들면서 수확하는 매실로 올해도 술을 담글 것이지만, 해마다 담근 술의 맛과 향이 각각 다른 것이 신기하다.
분명 같은 양의 매실, 같은 양의 당, 같은 양의 술을 붓고 만드는데도 매실의 더 익고 덜 익음 때문인지, 손톱만큼 늘어가는 나의 술 담는 실력 때문인지, 함께 마시는 이들과의 분위기 때문인지 해마다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올해는 매화를 얹은 소박한 화전에 작년부터 익힌 매실주를 잔에 따르고, 전에 얹다가 남긴 매화를 술에 띄웠으니 신선의 식단이 이렇게 생겼을까 싶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기만 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꽃부터 열매까지 나는 받기만 하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향기를 맡는 것으로도 모자라 차로, 떡으로, 술로 만들어 먹는다. 매화는 겉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섭취한 이후에 몸으로 전달해 주는 영양까지 찬란하다.
매화는 생기를 주고 피를 맑게 하며, 매실은 소화력을 회복시키고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어 입맛이 돌게 만든다. 받기만 하는 삶. '자연보호'라고 어릴 적부터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올 봄에는 꽃부터 열매까지 아낌없이 주는 매화 나무를 보며 말뿐 아닌 진정한 '보호'를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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