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는 아내의 장례미사를 집전한 신부(크리스토퍼 칼리)를 "공부만 한 스물일곱살 숫총각이 인생을 아느냐"며 애송이 취급하는,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의 고집불통 마초 노인네다.
장례식장에 피어싱을 하고 나타난 손녀에 대한 월트의 못마땅한 심사를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실룩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내는 영화의 첫 장면은, 월트 역에 79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얼마나 적역인지 대번 알게 했다. '그랜 토리노'는 주연과 감독에 노래까지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력으로 충만한 영화다.
하기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마초가 아닌 적은 없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러브스토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미지는 1960년대의 마카로니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에서 시가를 비껴 문 총잡이, 70~80년대 '더티 해리' 시리즈의 무뚝뚝한 냉혈한 형사였다.
'더티 해리'의 형사 해리는 멋지고 착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었지만, 범죄와 무질서에 지친 미국인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이스트우드는 실제 대선에서도 공화당 리처드 닉슨과 존 매케인을 지지했다. 결혼과 동거를 반복한 것도 외도 때문이었고, 외도로 낳은 아이까지 7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마초도 늙은 만큼 성숙해진다. 옆집 몽족 소년 타오(비 뱅)와의 인연은, 동네 갱단의 협박을 받은 타오가 월트의 72년형 포드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덜미를 붙잡힌 악연에서 시작하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식들보다 이 동양인들과 더 잘 통하냐"며 혀를 끌끌 차던 월트는 타오를 아들처럼 여기고 남자로 키워내며 남몰래 보람을 느낀다.
월트는 곧 클린트 이스트우드이기도 하다. 1996년 재혼해 어린 딸을 둔 그는 최근 "젊었을 때는 성공에 목말라 좋은 아버지가 못 됐지만 이제는 딸과 가족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털어놓았다. 첫 아들 카일 이스트우드는 이번 영화의 주제가를 만들었고 아버지가 불렀다.
월트가 "날도 추운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적개심을 숨기지 않던 몽족 이민자를 결국 끌어안고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와 희생을 아는 인생, 미워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한참 웃으며 보다가 결국 눈물을 짓게 만드는 이 영화는 전형적 캐릭터를 연기하던 한 배우가, 깊이있게 인물을 그려내는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영화인생 50년 만에 이러한 인생의 깊이를 알 수 있다면 늙어볼 만한 일이다. 19일 개봉.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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