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는 유일한 '영국제(製)'는 입구의 수위 뿐이라 한다. 대부분의 소장품이 '해가 지지 않았던' 전성기 시절 전 세계에서 끌어다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뚱맞은 전시품은 '엘긴 마블(Elgin marbles)'. 이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들은 원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것들이다. 1806년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에 주재하던 영국 대사 토머스 엘긴이 뜯고 잘라서 집에 가져 갔다가 자기 정부에 팔아먹었다. 남의 나라 보물을 약탈해 자기 것처럼 여기는 못된 심보를 '엘기니즘(Elginism)'이라 한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이 끝나기 직전 청나라 수도 베이핑(北平, 현 베이징)까지 진격했던 영국ㆍ프랑스 연합군이 황제의 여름별장에서 청동 12지 동물조각을 약탈해 갔다. 그 중 5개는 우여곡절 끝에 회수했으나 나머지는 행방불명. 최근 프랑스 크리스티 경매에 작년에 사망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유품으로 쥐와 토끼 조각이 나왔다. 중국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경매는 강행됐는데, 한 중국인이 최고가를 제시해 낙찰 받고는 돈을 안 내겠다고 선언해 경매를 무효로 만들었다. 모든 중국인들이 그를 우리의 안중근 의사처럼 여기고 있다.
■인도의 국부로 칭송 받는 마하트마 간디의 유품이 뉴욕 안티쿼럼 경매에 나와 인도인들이 분개하고 있다. 우리도 기억하는 동그란 철제 안경은 '인도의 자유를 응시한 성인의 눈'이라는 애칭까지 갖고 있다. 생전에 자신의 무저항 시위에 협조해준 인도인 장교에게 선물한 것인데, 그것이 회중시계 가죽샌들 등과 함께 미국인 손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인도는 경매 자체를 엄청난 모욕이라고 여겨 정부 차원의 저지 노력을 하지만, 응찰자금을 위한 국민모금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오늘 경매가 강행된다는데 '인도식 대응'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우리는 어떨까. 중국의 자존심과 인도의 존경심을 감안하면 '이순신 장군이 휘둘렀던 칼'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 칼은 일제시대 장군의 사당이 있던 경남 통영 충렬사에 보관돼 있었는데, 훔쳐 달아나던 일본인들이 배에 싣기 직전 뒤쫓아간 스님과 주민들이 빼앗아 온 적이 있었다. 지금은 현충사에 보관돼 있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 받으려고 우리 정부는 떼제베 KTX까지 사주었으나 결국 사기를 당한 꼴이 됐다. 엘기니즘에 대항하려면 정부 외교로는 어렵다. 돈을 벌어 되사든지, 힘을 길러 뺏든지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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