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회에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야당이 국회폭력 사태에 대한 따가운 비판 여론을 의식, 쟁점법안 저지를 위한 대체 수단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2월 국회에서 새 풍속도로 등장한 필리버스터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보여 준 것은 3일 밤 본회의에서였다. 야당은 잦은 의사진행발언과 찬반토론 신청, 수정안 제출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여당의 법안 처리 속도전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금산분리 완화를 위한 은행법 개정안과 미디어 관련 법안 2건 등의 처리가 불발됐다.
임시국회 회기 종료 세 시간 전인 이날 밤 9시께, 김형오 국회의장은 70여건의 법안 표결을 위한 본회의를 시작하면서 시간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민주당 이석현 송영길 의원 등이 의사진행발언을 신청해 김 의장의 최근 처신을 비판했다. 밤 10시50분께 출총제 폐지 법안을 처리하려고 할 때 필리버스터 전략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민주당 홍재형 의원의 수정안 제출에 이어 창조한국당 유원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등의 찬반토론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발언시간 논란이 벌어지면서 20분 동안 소란이 이어졌다. 장내 소란이 진정된 뒤에도 야당 의원들의 찬반토론 신청은 계속됐다. 김 의장이 "자정이 지났다"면서 회기 종료를 선언하는 시점에도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저작권법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1973년 발언 시간을 15분 이내로 제한하는 국회법 개정이 이뤄진 뒤 거의 사라졌던 필리버스터가 모처럼 재연되는 순간이었다. 과거에는 종종 필리버스터 장면을 볼 수 있었다. 1964년 김대중 의원은 야당의 김준연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19분 동안 의사진행발언을 했다. 또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은 3선 개헌 국민투표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무려 10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았다.
발언시간 제한에도 불구하고 3일 밤 필리버스터가 효력을 보여 준 것은 회기 마감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소수 야당이 육탄전 대신에 합법적 발언 등을 통해 법안 처리를 저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리버스터는 긍정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수결 원리를 훼손시키고, 시급한 민생 법안 처리까지 지연시킬 수 있다는 점은 따가운 비판을 받게 된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악의적 의사진행 방해로 법안 처리가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필리버스터 도입론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3일 본회의에서의 발언 신청 등은 필리버스터가 아니다"고 부인하면서도 쟁점법안 처리가 저지된 데 대해 내심 만족하는 분위기이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 등은 앞으로 필리버스터 전략을 적극 구사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