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 감기 전에,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산화한 우리 장조카를 꼭 찾아주십시오."
4일 오후 경기 고양시 풍동의 한 아파트. 암 투병중인 서우인(78)씨는 잃어버린 혈육을 찾기 위해 60여년 전의 역사를 꺼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제 말기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다른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조카를 생의 마지막 임무로서 찾아 나선 것이다.
서씨의 조카 영효씨는 1948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24살의 젊은 나이로 전사해 당시 '독립 영웅'으로 추모됐다고 전해진다. 1924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조카는 1942년 일제 징병으로 인도네시아 전선에 참전해 포로로 잡혔다가 45년 종전 후 석방됐지만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그는 이후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치르던 인도네시아군에 참여했다가 48년 전사, 불꽃 같았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한국인이 참여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한-인도네시아간 외교사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다. 이를 전하는 거의 유일한 사료가 한국일보 1958년 5월 18일자 '인도네시아의 회고- 인니 독립운동에 영웅된 우리 교포'라는 제목의 기사다.
서씨가 이날 서재 깊숙한 곳에서 꺼낸, 빛 바랜 신문 스크랩에는 바로 이 기사가 실려있었다. 당시 기사에는 영효씨의 활약상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印泥(인도네시아) 獨立戰爭(독립전쟁)의 英雄(영웅)이 된 韓國靑年(한국청년)을 紹介(소개)하기로 한다'로 시작되는 기사는 '和蘭軍(화란군)이 1948년 말경 (인도네시아) 獨立軍(독립군) 最後(최후)의 據點(거점)인 욕자카르타(Yogjakarta) 市(시)로 進擊(진격)하여 왔을 때…君(서영효씨를 지칭)은 암바타와 고지에서 勇敢無雙(용감무쌍)한 戰鬪(전투)를 하여 和蘭軍(화란군)의 進擊(진격)을 挫折(좌절)시켰으나 자신의 機關銃(기관총)과 함께 戰死(전사)하고 만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기사는 또 당시 인도네시아군이 영효씨의 유해를 가지고 욕자카르타 시내를 행진, 시민들이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으며 유해를 욕자카르타의 외인묘지에 안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씨는 "197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이 신문을 꺼내며 '영효를 찾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네가 꼭 묘비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며 "58년 한국일보 기사가 장조카에 대한 유일한 단서"라고 말했다. 서씨는 숨진 영효씨보다 7살이 적지만, 5촌 당숙으로 영효씨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다. 2남1녀 중 장남이었던 영효씨의 남동생은 이미 숨졌고, 여동생은 출가 후 왕래가 끊겼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조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당시만해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육사 11기 출신으로 1980년 예비역 대령으로 예편한 서씨는 한동안 조카 일을 잊고 있다가 2005년 방광암 수술을 받은 뒤부터 조카에 대한 마음의 빚이 커져 갔다.
결국 지난달 23일 평소 친분이 있던 채현석 건국대 박물관장과 함께 일주일간 인도네시아 욕자카르타를 방문했다. 50년 전 기사에 나와 있는 외인묘지와 국립묘지를 찾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현지 관계자로부터 "건국 초기 정변이 잦아 기록이 유실됐으며 일부 묘지는 수도 자카르타로 옮겨 갔다"는 말만 들었다. 준비해간 소주와 육포를 그대로 갖고 돌아왔던 서씨는 "대통령이 6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숨져간 혈육의 묘지를 꼭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조카의 묘지에 소주라도 붓고 싶은 게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채현석 박물관장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한 한국인에 대한 일부 기록이 일본에 남아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사료가 전무하다"며 "그나마 기록이 있는 서영효씨가 단초가 돼 연구가 활발해지면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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