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 폐회 1시간을 앞둔 3일 밤 야당 의원들은 쟁점법안을 포함한 30여개 법안이 아직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전술인 '필리버스터'를 쓰면서 법안 처리를 저지했다.
여당이 금산분리 완화와 관련된 은행법을 정무위에서 강행 처리한 것이 빌미가 됐다. 하지만 쟁점법안 처리 방안에 대해 극적으로 합의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야당이 사실상 합의내용을 파기한 것이어서 야당 자신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초 본회의는 이날 오후 2시로 잡혀 있었으나 은행법 등 쟁점법안 협의 지연과 의결정족수 부족 등으로 3차례 연기된 끝에 오후 9시에야 가까스로 열렸다.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의사진행발언을 연이어 신청, 발언시간까지 넘기면서 쟁점법안 직권상정 의사를 밝혔던 김형오 국회의장을 맹비난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국회의장이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맞춰 야당 교란작전을 편 것은 국회에 대한 모독"이라며 "의장은 이 점을 해명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당 송영길 의원도 "의장이 중재해 쟁점법안 처리에 합의하게 했으면서 다음날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사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게 적절한 행동인가"라고 비판했다.
김 의장은 이석현 송영길 의원 등 2명 이외에는 의사진행발언을 못하게 하고 "여야의 합의문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20분 만에 법안에 대한 표결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사회권을 넘겨받아 비쟁점법안 50개를 무리 없이 처리했다. 하지만 10시25분께 법사위에서 은행법 등 쟁점법안이 넘어오지 않자 25분 간 잠시 의석에 앉아 대기해야 했다.
이 부의장은 10시50분께 다시 본회의를 열어 법사위에서 넘어온 출자총액제 폐지를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30개 법안을 추가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밤 11시께 홍재형 의원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수정안을 들고 나와 의원 간 찬반토론을 벌이며 막판 시간 끌기에 나섰다. 홍 의원은 출총제 폐지에 따른 사후적 규율 조치가 필요하다며 법안 취지를 5분이 넘게 설명, 한나라당 의원들은 "빨리 끝내라"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어 홍 의원이 발의한 수정안에 대해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찬반토론 신청을 하자 여야 의원 간 고성이 오가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 부의장은 발언시간을 5분에서 3분으로 제한했지만 해당 의원들은 추가 시간을 달라며 반발했고 민주당 서갑권 원내수석부대표도 의장석 앞까지 나와 항의했다.
결국 쟁점법안 가운데 공정거래법과 한국정책금융공사법 등만 통과되고 은행법과 미디어 관련 법안 등은 본회의 회기 종료시간인 자정을 넘기면서 처리되지 못했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미디어 관련 법안과 관련해 반대 토론을 하겠다며 김 의장이 산회를 선포하는 순간까지 발언대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앞서 은행법등 여당이 이날 오전 정무위에서 강행 처리한 법안과 관련해 본회의에 수정안을 제출하기 위해 국회에서 협상 등을 벌였으나 합의점 도출에 난항을 겪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은행법을 정무위에서 날치기 통과시킨 후 여야 간 협상을 진행했지만 여당이 수시로 입장을 바꾸다 갑자기 4월 국회에서 처리하자고 제안했다"며 "여당이 날치기 처리한 은행법이 결국 응징을 받는 것"이라고 파기 원인을 여당에게 돌렸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정무위 표결처리는 여야 협의에 따른 적절한 조치였다"며 "민주당이 미디어 관련법과 경제관련 법안의 여야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비난했다.
고성호 기자 sung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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