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간지 한 달 정도 지났다. 보고 싶은 것도 잠시 뿐, 점차 휴대전화로 날아오는 카드 명세서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국가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이고 처음에 계획한 것보다 경제적인 부담도 많이 늘어나 "절약하라"는 말을 막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아내가 전화기를 낚아챘다. 통화를 끝낸 아내는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네요!"라고 한 마디를 던졌다. "경제위기나 당신의 대학시절을 거론해보아야 직접 체험하지 않은 다음에는 와 닿지 않을 것이고, 남의 경험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려면 역시 충분히 나이가 들어야 된다고 생각해!" 라고 덧붙였다.
잠시 요즈음의 화두였던 한국 박물관 역사와 맞물려 생각해보니 아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경우에도 젊은 날에는 박물관의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하였던 역사적 사실'로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마치 내 것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감회도 사실은 국립박물관에서 20여 년 세월을 겪었고 어느덧 50줄에 다가서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과 함께 젊은 날을 보내고서야 박물관 사람으로서 박물관 선배들의 희로애락 내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마치 내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조금이나마 쌓이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1909년 창경궁에서 <李 왕가 박물관> 의 문을 열기까지 순종황제께서 지녔던 열의와 궁내에서 일반인들이 관람하던 모습을 지켜보며 지었을 흐뭇한 미소도 이제는 손에 닿을 듯 가깝다. 그리고 일제에 강점되었던 암흑의 시기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일깨워준 고유섭 선생님과 모든 재산을 바쳐 구입한 문화재를 직접 사립박물관을 만들어 공개했던 전형필 선생님, 모든 것을 일본인들이 좌지우지하던 시기에 일선에서 묵묵히 박물관의 맥을 이어준 최순봉, 박일훈, 최영희 선생님의 노고도 뭉클하게 와 닿는다. 李>
뿐만 아니라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에 다시 박물관을 개관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열차와 트럭으로 이리저리 문화재를 옮겨야 했던 김재원, 최순우, 김원룡, 윤무병, 황수영, 진홍섭 선생님의 땀 냄새도 이제야 진정으로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혼돈의 시기에도 학술발굴조사와 사회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니 그 피땀의 숭고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회 전체가 산업화를 지향해 내달리기만 하던 1960~70년대에 박물관 운영철학과 유물정리, 조사연구, 교육활용의 기틀을 제대로 세워준 한병삼, 이난영, 정양모, 이준구 선생님 과 같은 선배들의 모습과 흔적을 박물관 곳곳에서 수시로 접하고 나면 코끝으로 시큰하게 눈물이 솟는 것 같다.
박물관의 역사가 수많은 선배들이 온 몸으로 지켜왔던 '역사'라는 사실이 박물관 살이를 어느 정도 지내온 나에게는 부쩍 실감으로 와 닿는다. 현대식 건물과 첨단 전시설비가 갖추어진 박물관이 즐비하여 박물관의 기나긴 역사에는 소홀할 수도 있는 요즈음, <李 왕가 박물관> 이후로 한국 박물관이 벌써 100년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니 그 자랑스러움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한국 박물관 100주년을 다른 누구보다도 박물관 선배님들, 박물관 인생의 선배들과 함께 기념하고 싶다. 李>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