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전구, 양동이, 신발, 커피포트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사물들의 그림이 서울 청담동 PKM트리니티갤러리에 가득 걸렸다. 그저 평범한 대량생산품들이지만, 그림 속에서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존재로 재구성됐다.
검정색의 단순한 선이 사물의 윤곽을 이루고, 그 위에 강렬하고 선명한 원색이 입혀졌다.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들은 영국 개념미술의 1세대 작가로 꼽히는 마이클 크레이그-마틴(68)의 작품이다. 그는 현대미술 최고의 스타인 데미안 허스트의 스승이기도 하다.
개인전을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온 크레이그-마틴은 팝아트와의 연관성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팝아트는 광고나 영화 등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지만, 나의 관심은 이미지가 아닌 사물에 있습니다. 또 사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것에 관심이 있죠."
크레이그-마틴은 1970년대 갤러리 벽면에 선반을 달고 그 위에 물을 담은 유리잔을 올려놓은 뒤 '참나무'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으로, 영국 개념미술에 전환점을 만들었다. 설치작업을 주로 하던 그는 1990년께부터는 뚜렷한 윤곽과 화려한 색상을 가진 일상 용품을 그리고 있다. 방식도 독특하다.
알루미늄 캔버스에 검정색으로 바탕을 칠한 뒤 컴퓨터로 작업한 이미지를 프로젝터로 비춘다. 그리고 이미지의 드로잉 라인 위에 특수 테이프를 붙인 뒤 롤러로 아크릴 물감을 바르고, 다시 테이프를 떼어낸다.
그가 일상 용품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나 콜라병처럼 잘 알려진 대상으로 작업을 했죠. 그렇다면 먼로보다 더 유명한 게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을 해봤습니다. 제가 얻은 답은 테이블이나 신발, 의자 같은 일상의 사물이었어요. 이런 평범하고 단순한 물건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표현이자, 가장 국제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레이그-마틴은 오랫동안 영국 골드스미스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영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허스트를 비롯해 1980년대 말부터 현대미술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일군의 영국 작가를 가리키는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이 이곳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재능을 가진 학생들은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재능은 많지 않지만 예술에 대한 의지가 강한 학생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좋은 작가가 된다"면서 "yBa는 개인의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관심사를 극한상황까지 몰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은 예술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악동'으로 불릴 만큼 늘 미술계에 이슈를 몰고 다니는 허스트에 대한 스승의 평가가 궁금했다. "그는 매우 독특하고 파워풀한 사람입니다.
yBa의 출발을 알린 1988년 전시 '프리즈(Freeze)'와 단일 작가 경매로는 최고 기록을 세운 지난해 소더비 경매로 그는 미술사의 한 시기를 열고 닫았다고 봅니다. 한 작가가 미술사의 한 시기를 규정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죠."
크레이그-마틴의 이번 전시에는 신작 회화 20점과 각 그림 속 이미지들이 모두 들어있는 15m짜리 대형 벽화가 나와있다. 31일까지. (02)515-9496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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