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이사회에서 "대학들의 양심을 믿어달라. 대학이 먼저 자율화의 판을 깨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입시 업무를 넘겨받은 대교협이 '자율과 규제'의 균형추를 맞추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자, 대학의 책무성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대교협 수장이 된 손 총장의 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총장들도 이해못한 전형 방식
대교협은 26일 고교등급제 논란을 불러온 고려대의 2009학년도 입시안에 대해 "문제 없음"으로 결론 내렸다. 4개월 넘게 끌어온 사태의 파장치곤 너무도 허탈한 마무리였다. 대교협이 이날 이사회에서 밝힌 '면죄부'의 근거는 이렇다. "학교측의 소명자료와 교육과학기술부의 고교등급제 정의를 검토한 결과, 고려대의 입시안은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의혹이 제기됐던 핵심 쟁점, 즉 ▦내신등급이 저조한 특목고 출신 대거 합격 ▦비교과 성적이 비슷한데도 교과성적이 높은 학생과 낮은 학생의 당락 뒤바뀜 ▦모집요강에서 밝힌 반영 계획(교과 영역 90%, 비교과 영역 10%)이 제대로 적용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단지 교과부가 말하는 고교등급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손 회장은 "특목고 출신을 우대했다는 일부 언론의 주장도 학교의 소명을 들어보면 반론이 된다"며 "그 동안 제기된 의혹의 진상은 고려대가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4차례나 진상조사를 하고도 정작 결과 발표는 의혹의 당사자가 하라는 식이었다.
이처럼 대교협 조사는 시늉만 낸 꼴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충분히 예견된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번 사태가 지난해 10월 일찌감치 불거졌는데도 대교협은 줄곧 소극적 태도를 보여 눈총을 받았다. 언론의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마지못해 "대학들의 입학전형이 모두 끝나는 2월 말에나 검토해 보겠다"고 밝히는 등 주도적으로 진실을 파헤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조사를 담당한 대학윤리위원회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15명으로 꾸려진 윤리위 구성원은 모두 대학 총장들이다. 입시 전문가 한 명 없이 알파(α)ㆍ케이(k)값(내신 보정 상수) 등 고려대 스스로 난해하다고 인정한 내신 산출과정을 분석ㆍ평가하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손 회장조차 "(나도) 우리 학교 전형안에 대한 설명을 몇 번 들어도 알 수 없다"며 "총장들이 복잡하고 미묘한 대입 전형 방식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고백할 정도다. 대교협 스스로 판단 능력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다.
대입 자율화 고삐 죌 수 있을까
대교협의 '온정주의'는 사태를 확산시킨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기본적으로 대학들의 협의체라는 대교협 속성상 자신들이 정한 지침 역시 '신사협정'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윤리위의 조사 태도에서도 읽혀진다. 한 윤리위원은 "자율화의 기본 전제는 신뢰"라며 "외부에 보안을 요구하는 내용까지 해당 대학 총장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교협은 지난해 자체 규정이었던 윤리위 설치 근거를 정관으로 격상해 대학 운영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높이도록 했다. 그러나 대교협의 '자율 규제' 실험이 사실상 무위로 끝남에 따라 자율화의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김진우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은 "(이대로라면) 3불(본고사ㆍ고교등급제ㆍ기여입학제 금지) 정책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정부 역할을 촉구했다. 민간 자율기구의 통제력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 이상 대학들의 이기주의를 어느 정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입시 혼란이 계속된다면 대입 자율화는 불가능하다"는 안병만 장관의 최근 언급에서 보듯, 정부도 일부 대학의 3불 흔들기에 제동을 걸 방침임을 내비쳤다.
하지만 대교협은 정부가 참여하는 입시협의체 구성 계획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날 이사회에서도 "대입 완전자율화가 이뤄지는 2012년 이후에 교육협력위원회를 만들어도 늦지 않다"는 결정을 내려 정부의 입시 개입 가능성을 거듭 경고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달부터 협의체를 가동하려던 정부와의 의견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 당분간 '자율화 퇴색'과 '정부 역할론'을 놓고 찬반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