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 예술적인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다." "대학입시에서 현재와 같은 점수 위주 선발 방식은 벗어나야 한다." "대학의 자율성은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언뜻 전교조 위원장이나 진보 성향의 학부모 단체 대표가 평소 지론을 설파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발언이 이명박 대통령이 며칠 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역설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난 1년간 '이명박표 교육정책'의 핵심 키워드가 경쟁과 자율이라는 것을 아는 국민들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교육철학이 바뀐 것인가, 아니면 실언을 한 것일까.
자율형사립고와 기숙형공립학교 설립, 국제중 개교, 전국단위의 일제고사와 성적공개…. 취임이후 숨돌릴 틈 없이 쏟아냈던 교육정책의 골간은 경쟁지상주의였다. '특별난' 중ㆍ고교가 넘쳐 나면 여기를 가려는 학생들이 몰려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경쟁은 결국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는 좁은 문을 누가 들어가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교육을 강화한다 한들 내가 들어가려면 상대를 밟고 넘어가야 하는 탓에 자연스럽게 사교육을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애당초 그런 학교를 많이 만든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의 점수 경쟁은 공교육 마저 황폐화시킨다. 지금 일선 학교는 말이 공교육 강화지 '학교의 학원화' 로 몸살을 앓고 있다. 0교시와 야간자율 학습이 부활하고, 초ㆍ중학교까지 우열반이 기승을 부린다. 특기적성 위주로 진행되던 방과후학교는 국ㆍ영ㆍ수 위주의 강제 보충학습으로 변질됐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력과 사고력 운운하는 것 자체가 현실을 도외시한 배부른 소리다.
대입 자율화 정책이란 것도 실상과 동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대학들은 어떻게 하면 점수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수 있을까 온통 관심이 쏠려있는데 이제 자율화됐다며 대학 마음대로 뽑으라 하니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다. 수능이 등급제에서 점수제로 바뀌고, 내신과 수능 반영이 자율로 바뀌자 대학들은 너도나도 '믿지 못할' 내신 대신 수능 성적 비중을 크게 높였다. 수능 반영 비율이 높아지면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결국 성급한 대입 자율화가 되레 점수 위주의 선발을 부추기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교육비 부담을 늘린다.
점수 조작과 은폐로 만신창이가 된 학업성취도 평가의 문제도 결국은 경쟁에 있다. 전국의 각 지역의 초ㆍ중ㆍ고교 점수를 만천하에 공개해 일렬로 죽 늘어 세우니 학교와 교사들이 부정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기초학력 미달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해 이들의 학력을 끌어올리자는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성적을 공개해 서열화를 하다 보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교육 근절과 공교육 정상화, 성적위주 교육시스템의 과감한 개혁 등을 역설한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내용은 구구절절이 옳다. 그러나 겉으로는 말만 그럴듯하고, 실제 교육정책은 딴판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대통령의 말은 천금 같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교육개혁에 대한 의지가 구두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충재 부국장 겸 사회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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