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은 '비운의 문'으로 불린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옮겨와 사당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흥화문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의 건축자재들이 박문사 건립에 동원됐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사진수집가인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이 3ㆍ1절을 앞두고 24일 공개한 1930년대 사진을 보면 본래 조선 궁궐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에는 '경춘문(慶春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春畝)'에서 그 이름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박문사가 들어선 언덕도 춘무산으로 불렀다.
장충단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전사한 홍계훈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일제는 1919년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으며, 박문사까지 이곳에 만들었다. 박문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헐렸지만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나마 구세군회관 등이 들어선 탓에 원래 위치와 다른 곳에 복원됐다. 원래 흥화문 터에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정성길 관장은 조선 부녀자들이 일본인 감독관의 지시 아래 박문사 잔디를 손질하는 모습과 박문사를 방문한 참배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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