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밤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잡은 ‘나눔의 집’ 생활관에는 24명의 일본인과 21명의 한국인들이 쭉 둘러 앉았다. 이들은 통역을 통해 더딘 소통을 하면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체인 ‘나눔의 집’이 매년 개최하는 6박7일 일정의 역사 워크숍 ‘피스로드(Peace Road)’ 행사 첫날이었다.
“2차 대전 때 일본은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 한국과 중국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일본의 가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어요.” 수업발표 준비를 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알게 됐다는 세이난가쿠인(西南學院)대 국제관계법학과 2학년 요로즈 유리카(20ㆍ여)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어 재일동포 3세 박희사(21ㆍ여)씨가 차분히 발언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왜 갈수록 무관심해지는 거죠? 한국인들이 자기 역사를 지킨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석 달 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박씨는 실상을 정확히 봤다. 요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우리사회에서 관심 밖이다. 도움의 손길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오히려 일본인들의 관심과 참여는 늘고 있어 대조적이다.
피스로드 참가자만 해도 그렇다. 2004년 이후 참가자는 일본인이 165명, 한국인이 144명으로 한국인들의 참여가 더 저조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대학 4학년 이승진(23ㆍ여)씨는 “‘취업 때문에 정신도 없는데 그런 곳에 왜 가냐’며 친구들이 말렸다”면서 “잠시 망설였지만 직장에 들어가면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오게 됐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이 운영하고 있는 역사관의 단순 관람객 역시 한국인들은 2007년 4,000여명에서 작년 2,600여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2007년 2,600여명이 다녀간 데 이어, 작년에도 이와 비슷한 2,300여명이 관람했다. 작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국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위안부 사죄 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위안부 피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줄어든 것이다.
국내 봉사자들 가운데는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의무적으로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찾아오는 중고생이 적지 않다. 때문에 봉사 참여자들의 마음가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작년 나눔의 집 한국인 봉사자 수는 2,030명이지만, 잠깐 왔다가는 중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장기 봉사자는 거의 없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사무국장은 “대개가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단체로 오거나 대학입학원서에 봉사경력을 써넣기 위해 오는 중고생들로서, 다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할머니들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청소만 시키다 돌려 보낸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인 등 외국인 봉사자들은 숫자는 작년 98명으로 많지 않지만, 한번 오면 평균 2주일에서 한 달씩 머물며 할머니들과 마음으로 교감하고 번역 등의 전문적인 일을 도와준다.
피해 할머니들이 가장 보고싶어 하는 봉사자 역시 한국인이 아니라, 3년 전부터 매년 3,4차례 찾아와서 한 달씩 봉사하다 가는 일본인 나가하마 카즈코(60ㆍ여)씨라고 한다. 카즈코씨는 지난달에도 입국해 방과 화장실 청소를 하며 피해 할머니들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다 최근 돌아갔다.
후원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1998년 300여명의 개인들이 후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매년 2,000만원씩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2005년 후원회가 공식 출범했지만 별다른 활동이 없어 사실상 해체된 상태다. 현재 국내 후원금은 일회성으로 개인 후원자들이 내는 것이 전부다.
후원 기업도 국내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 세로노’가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안 국장은 “매년 400대 기업에 소식지를 보내지만 도움은커녕, 백화점 등 자기 건물 앞에서 서명도 못 받게 한다”고 말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4년째 나눔의 집 역사관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무라야마 잇페이(29)씨는 “용기 있게 역사를 밝힌 할머니들이 한분 한분 돌아가실 때마다 더 휑해지는 장례식장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아흔 세분 밖에 남지 않은 만큼,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