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겨우 두 달인데 그 세월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인 것 같습니다. 하기는 지난해 끝자락도 그랬습니다. 스스로 삶을 거절한 죽음들이 그리 잦았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억울한 죽음'과 '뜻하지 않은 죽음'들이 연달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제각기 까닭이 있고 사연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죽음에 대해서는 분노가 일기도 했고, 어떤 죽음은 억장을 무너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둘이 얽히고 설키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떤 죽음자리에서는 하늘마저 뚫을 듯한 적의(敵意)가 자명한 도덕이 되기도 했고, 또 어떤 죽음자리에서는 땅이 꺼지는 허탈한 탄식이 일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죽음소식이 분분하면 사는 것이 편하지 않습니다. 흐리고 찌푸린 날씨 겪듯 사람들은 우울해집니다.
그렇지 않은 죽음도 있었습니다. 착하고 바르고 참되게 살다 그렇게 갔다고 일컬어지는 죽음도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죽음을 슬퍼했고, 아파했고, 또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의를 낳지도 않았고 탄식을 내뱉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죽음 소식을 듣고 옷깃을 여몄고, 그 주검 앞에서 자기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 죽음은 마치 겹쳐 닥친 죽음들이 쌓아놓은 음산하고 습한 바람을 단번에 쫓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억울한 죽음도 뜻하지 않은 죽음도 그 죽음을 통해 위로를 받는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미움도 자학도 모질고 굽은 자기 모습을 조금은 스스로 누그러뜨리게 하는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죽음소식은 드문 것이 아닙니다. 무릇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습니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함께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소식은 실은 '일상'입니다. 언제 어디에나 삶과 더불어 있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죽음을 우리는 애써 가리려 합니다. 죽지 않을 듯이 삽니다. 죽음이 곧 삶의 끝인데도 '나는 죽음을 향해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헤어짐의 아픔을 가져오고, 어떤 꿈도 다 흩어버리며, 결국 내 존재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인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삶은 '병든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죽더라도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죽을 것 당연한데 지레 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죽을 생각만 하며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허무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처럼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죽음을 간과하는 일은 자기를 속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레 죽는 비현실성'이나 '죽음을 간과하는 부정직성'을 넘어서야 비로소 사람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삶을 내 죽음마저 포함하여 다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음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다운 삶입니다.
요즘 죽음을 준비하자는 '운동'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특정한 연령 대에만 필요하겠습니까만 특히 늘어나는 노년세대를 위해서는 적절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과정이 다양한 내용들로 꾸며져 있는데 그 중에 노인들에게 자신의 죽음정황을 예상하게 하는 질문지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쯤 죽을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들이 그것입니다.
노인들은 자기의 죽음을 헤아려 이를테면 5년 혹은 10년 뒤라고 하는 대답을 별로 힘들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병이 들어 병원에서 죽을 거라는 응답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 두 물음에서는 선뜻 쉽게 반응하는 분들이 드물었습니다. '내 죽음을 누가 진정으로 슬퍼할까?', '내가 죽은 다음에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하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뒤의 물음은 실은 죽음에 대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물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며 한 물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에 대한 물음은 곧 삶에 대한 물음입니다. 죽음을 응시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삶을 의미 있게, 그리고 담담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을 귀하게 여겨 자기 안에서 죽음이 스스로 온전해지기를 바란다면 그 또한 삶을 귀하게 여겨 자기 안에서 삶이 온전해지기를 바라며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해야 할 일은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자리에서 삶을 관조하는 일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지레 숨이 막힙니다. 두렵고, 허무하고, 절망적입니다. 산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죽음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갑자기 삶이 넉넉해집니다. 삶을 잘 가꾸어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싫고 미운 것이 없지 않은데도 어서 싫은 것 좋아하고, 미운 것 사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억지로 애를 쓰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죽음이 겁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죽음이 무섭고 죽기 싫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귀하게 여기고 내 품에 고이 담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자리에서 삶을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삶이 완성의 자리에 이른다는 축복이니까요.
죽음에 대한 분노도, 죽음에 대한 탄식도, 죽음에 대한 추모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아름다운 정서가 자신의 이념의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확산하기 위한 구실로, 또는 간접적인 자기 위로를 위한 심리적 동일시 현상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기를 부정당한 채 다만 '소비재(消費財)'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죽음이 그렇게 되면 인간의 삶도 또한 그렇게 수단화하고 물화(物化)되어 하나의 소비재가 되고 맙니다. 삶의 모습이 이보다 더 천박하고 황량하게 비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죽음들을 겪은 끝자리에서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삶을 죽음자리에서 조망하는 일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죽어, 되살기'로 작정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세월흐름은 '내 죽음'도 그만큼 바짝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해주기 때문입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 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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