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의 날이었다. 딱딱한 영국식 영어 발음의 백인들과 가무잡잡한 피부색의 동양인들이 할리우드의 최고 단상을 점령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영국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23일 오후(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 할리우드의 최대 축제 제81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 등 주요 부문 상을 휩쓸며 8관왕에 올랐다.
영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것은 8번째로, 1981년 '불의 전차' 이후 28년 만이다. 1999년에는 미국ㆍ영국 합작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7개 부문 상을 수상했다.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 사이에 국경의 벽이 사실상 사라졌다지만 이국적인 색채가 강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아카데미 '점령'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뭄바이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앵벌이 청소년 자말(데브 파텔)이 우연치않게 상금 100만 달러의 퀴즈쇼에 출연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도의 작가 겸 외교관인 비카스 스와룹의 소설 '큐 앤 에이'(Q and A)에 소리와 색깔을 입힌 영화다.
'트레인스포팅'과 '29일후' 등으로 유명한 영국 감독 대니 보일이 연출했으며 인도의 무명 배우들이 극을 이끌어간다. 할리우드가 가장 만들고 싶어하고 신뢰하는 내용의 이야기에, 발리우드 풍의 화려한 음악을 포장해 눈길을 끌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뭄바이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고통스런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 화제가 됐으나 인도 사회를 지나치게 어둡게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선전은 이미 예고됐었다. 1월에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 드라마 부문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데 이어 8일 영국 아카데미영화상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분위기는 초반부터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기울었다. 사이먼 뷰포이가 각색상을 받으며 분위기를 제압했고, 음악상(A R 라만), 주제가상(자이 호), 편집상(크리스 딕큰스)을 잇달아 받으며 기세를 올렸다.
절정의 순간은 대니 보일이 감독상을 안으면서 달아올랐다. "아카데미 후보작이 될 것이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을 줄곧 해온 보일 감독은 상을 받은 뒤 "당신들은 우리들에게 정말 너그럽다.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시상대에서 "기적이 일어났을 때 (인기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에 나오는 말썽쟁이 호랑이 '티거' 정신으로 이렇게 하기로 아이들에게 아주 오래 전 맹세했다"며 세 차례 껑충껑충 제자리뛰기를 하기도 했다.
작품상을 받아든 제작자 크리스천 콜슨은 "우리는 스타도 없었고, 힘도 근육도 없었고, 돈도 충분치 않았다. 단지 사람들이 읽으면 미친듯 빠져들고 마는 각본이 있었을 뿐"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주요 상을 휩쓴 반면, 13개 부문 후보로 올라 최다 부문 후보작이었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변죽만 울리는 데 그쳤다. 지구에 홀로 남은 폐기물 처리 로봇의 이야기를 담은 '월-E'는 최우수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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