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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5> 가수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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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5> 가수 이정선

입력
2009.02.25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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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연구실의 서재는 그 주인의 내면 풍경을 그대로 비춰준다. 블루스 가수 이정선(60) 동덕여대 공연예술대학장의 연구실 한쪽 벽면은 음반들로 가득 차 있다. 국악, 한국 인디, 재즈, 라틴, 힙합, 일렉트로닉, OST, 남성ㆍ여성 솔로 등으로 분류된 벽면은 마치 정리된 도서관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다. 진짜는 집에 있다. 자신이 구입한 LP가 1,000여장이다. 거개가 편곡, 기타ㆍ하모니카 세션 등으로 직접 제작에 참여한 작품들이다.

"놀며 살았는데 꽤 했네요. 그런데 돈은 못 벌었어요." 경제(돈)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객쩍어진다. "뽕짝도 내가 부르면 블루스가 돼 버리니…." 블루스, 블루스 하지만 정작 진짜 블루스는 한참 마이너 장르가 돼 버리는 이 땅에서 그는 여전히 꿈꾸고 있다.

- 요즘은 학교 밖에서 보기가 힘들다.

"학생 가르치는 게 주업무라 그렇다. 음악하며 돈도 벌고 싶지만, CD의 시대는 끝났지 않은가. 학교 앞(대학로)에 있던 CD 매장들은 다 사라졌다. 인터넷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다."

- 학교서 어떤 것을 가르치나.

"대학원 전공으로 '싱어 송라이터 연구', 학부생에게는 '가요 작법'과 '전공 실기 노래'를 강의한다. 핵심은 1시간 동안 1명을 레슨하는 '전공 실기'다. 예인을 길러내는 전통적 방식인 도제 시스템을 내 식으로 바꿔 본 것이다."

- 노래방의 보편화 등으로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없는 시대다.

"있는 그대로 부르는, 편하고 듣기 쉬운 소리가 최고다. 학생들이 요즘 유행하는 R&B 창법을 흉내내면 나는 '너, 끙끙대지 말라'며 당장 중지시킨다. 어설프게 흑인 창법을 모방한 노래를 나는 '알과 비'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R&B를 우리말로 직역한 것인데, 왠지 이상하지 않느냐. 그게 다 껍데기 포장에 더 신경 쓰기 때문이다. 콧소리도 내지 말고, 노래는 얘기하는 것처럼 하는 게 최고다."

- 일반인들이 블루스의 진짜 맛을 알려면.

"나는 요즘 블루스를 단순하게 하고 있는데, 결국 블루스의 깊은 맛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 교육 활동은 언제부터 했나.

"1988년부터 서울예전에서 가르쳤다. 창립 멤버였던 길옥윤, 정성조씨보다 1년 늦었다. 5년 정도 가르쳤는데 정이 들만큼 들었다. 이어 동덕여대에서 교수로 8년째 가르치고 있다."

- 국내 실용음악과의 현황은.

"10년 전부터 급증, 현재 전국에 50여 개가 있다. 특히 지방대의 경우 실용음악과는 학생 유치를 위한 카드인 경우가 많다."

-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창의력이다. '네 음악을 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잘 안 된다. 먼저 배울 걸 다 배워야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인데, 음악의 학문화 탓이 크다. 나의 경우는 카드가 하나 있다. 뭔가 그럴 듯하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맞는 게 대중성과 학문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음악인 재즈다. 학생들도 일단 배우면 그 늪에 빠진다."

- 실용음악 교육이 힘든 이유는.

"체계화하기 힘든 게 가장 큰 문제다. 20여년 가르쳐 왔지만 사실 불가능한 문제다. 대중음악은 딜레마의 예술이다. 이론으로 가둬 놓는 순간, 대중음악이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 '실용'의 의미는.

"실제적 활동에 가장 큰 비중을 둔 말이다. 그것을 위해 학생들에게는 가요, 록, 포크, CCM 등 모든 장르를 다 배우라고 권한다, 본인의 안목이란 그 다음 나오는 것이라며. 실용음악이 학문적으로 홀대받은 데에는 정책적으로 정통 예술의 보호ㆍ육성에만 치중했던 까닭이 크다. 대중음악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먹고 살 수는 있다는 통념도 한몫했다."

- 사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홍대 앞 클럽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의 예를 들어 보자. 하루 종일 일하고 1만원 받는다. 그게 실상이지만, 정책입안자들은 제쳐놓고 본다. 돈 잘 벌고 있지 않느냐며. 실제로 음악만 하고 사는 사람은 5%도 안 된다.

음악 할 수 있는 장(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외국의 경우는 콘서트와 저작권이라는 두 기둥이 있지만 한국은 방송국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방송이 아니면 홍보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수들이 토크쇼로 몰리는 것도 방송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게 하는 구조 탓이다."

- 인터넷 공간이 또 다른 가능성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성인층은 인터넷이 가짜라는 걸 안다. 그들의 인터넷 활용이라 해봤자 동호회 차원이다. 그런데 고급 정보의 보루가 돼야 할 신문들도 세부적인 사항은 인터넷으로 넘겨버리고 만다. 지금은 무지 애매한 시대다. mp3 문제가 최대의 현안이다.

지금 상황이 과도기인지 혹은 전환기인지 나로서도 판단이 잘 안 선다. 음악인들은 모이면 그 고민이다. 하여튼 어려서부터 거기 익숙해진 세대는 그것이 곧 음악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워낙 거센 변화라 대안적 움직임도 없다."

- 막연히 던져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교수들과 공동 연구할 학회를 지금 추진중이다. 우선 '실용음악'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첫 번째 관문일 것 같다. 과가 세분되거나, 학교마다 특성화될 것 같다. 재즈나 뽕짝 등으로 과를 나눠서 '실용음악대학'이란 틀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일본에서도 거기 대한 답이 없다. 그네들은 '단기대학'(전문대) 안의 포퓰러 뮤직 또는 재즈과 정도로 해 두고만 있다."

- 지금은 가요계의 어른이지만 왕년에는 왕성하게 활동한 가수였다. 자신의 출세곡은 뭐라고 생각하나.

"(웃으며) 아직 없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 68학번인데, 4학년(1976년) 휴학 중에 낸 포크록 풍의 앨범 '거리'가 첫 앨범인 셈이다. 순전히 복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곡이 '불신풍조 조장'이라는 우스꽝스런 이유로 금지당했다.

'신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사람을 믿는 사람은 없으니'라는 가사가 트집 잡혔다. 그때는 노래 서클 '메아리'도 없던 때였다. 재학 중 지었던 '섬소년'이 2년 뒤 알려지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4분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길이의 곡이었다."

- 포크 그룹 '해바라기'와 블루스 그룹 '신촌블루스'의 리더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해바라기'는 이광조, 한영애, 김영미와 함께 포크, 뽕짝, 민요의 재해석에 치중했다. 이주호가 입대하고 뒤를 이은 이광조는 노래를 진짜 잘 불렀고, 한영애는 늘 딴 꿈을 꾸는 듯 독특한 캐릭터였다. 모두 좋은 친구로 요즘도 종종 만나지만 새 음악을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신촌블루스'는 시대의 변화, 음악과 경제의 문제를 의식한 그룹이다.

듣는 사람을 위한 음악을 하자는 데 나와 엄인호, 김현식이 뜻을 함께 했다. 극히 간단한 장비를 갖고 신촌의 레드제플린에서 매주 1회, 1년 공연하니 사람들이 몰리더라. 나는 당시 그룹 이름을 '뽕 블루스'로 하자고 했다. '뽕짝 블루스', 즉 한국의 한이 담긴 블루스를 추구한 그 그룹 활동으로 나는 음악의 재미란 걸 알게 됐다."

■ 국악은 나의 새로운 도전

"B B 킹은 단 한 음으로 오케스트라를 감당해내죠. 그는 몸 전체가 블루스예요. 나는 기타 치면 포크도, 록도, 재즈도 되지만 킹은 뭘 해도 블루스가 되죠."

댄스 뮤직, 뽕짝, 록 일변도였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건널 수 없는 강' 등 한국적 블루스의 명곡들을 선사, 음악의 지평을 넓힌 이정선씨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꾼다.

"건강하게, 기타를 오래 치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 손가락 연골이 닳아, 장시간 연주하거나 힘든 코드를 치면 손가락이 꼬여요.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한 음을 가지고 '맛있게' 치는 법을 연구중이죠." 하드웨어(손가락)의 변화에 소프트웨어(주법)가 조응한다. 속주의 기교를 넘어선 신지평의 세계를 그는 꿈꾸고 있다.

그가 최근 발표한 11집 앨범 'Hand Made'에서는, 성금연 류를 계승한 지애리씨의 가야금 산조와 블루스 기타가 서로를 탐하며 새 세계를 펼쳐 보인다.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는 일이다. "MBC TV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에 출연하면서 국악과의 퓨전 작업을 처음 시도했어요. 알수록 힘들어지는 세계였지만, 양악 하는 사람의 숙제인 동시에 국악에 대한 의무라는 믿음으로 연구해 왔어요."

대표적인 예가 대금과 가야금이 동원됐던 '나들이'다. 이후 그 같은 문제 의식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물밑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국악기로 하는 양악, 양악과 국악의 혼합 등 퓨전적 시도가 주류였죠. 나는 국악 같은데 국악기는 하나도 안 쓴 음악을 할 생각이에요."

군대 시절 가수 양악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막 창설된 육군국악대의 부탁으로 함께 활동, 박범훈, 국수호 등 국악인들과 알게 되면서 국악에 빠져들었다. '망부석'의 김태훈이 당시 육군국악대 단원이었다.

5음계의 블루스와 5음계의 국악이 그의 손에서 어떻게 '맛있는' 음악으로 거듭날지, 본격 성과물을 세상에 막 내놓은 그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작심하고 제작한 이번 앨범이 빛을 보기도 전에 음반사가 망해 버렸어요." 입은 웃지만, 마음은 좀 시리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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