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 흩날리는 늦겨울 경주는 다가올 봄 맞이에 달떠 있었다. 봄이 오면 이곳에선 전국의 이목이 쏠린 국회의원 재선거가 치러진다.
21일엔 TV에서나 보던 국회의원 여럿이 서울에서 내려 왔다. 17대 의원이었지만 1년 전 18대 총선에서 뜻밖 고배를 마신 정종복 한나라당 예비후보 사무실 개소식이 열린 것이다.
작년 12월 11일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무소속 정수성 예비후보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러 이곳을 찾았고, 여기 사람들 표현대로 경주 전체가 들썩였다. 재보선 선거일인 4월 29일까진 여러 번 더 그럴 터. 친이명박계 대 친박근혜계의 전투가 예고된, 정치적 의미가 작지 않은 선거를 앞둔 천년고도(古都)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시내 중심가 많지 않은 빌딩 마다 현수막이 내걸렸다. 재선거에 나서려는 예비후보 사무실들이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겠다는 9명을 포함, 모두 15명. 한 건물 관리인은 "작년에는 정종복 무섭다고 아무도 안 나오더만 이번엔 너도 나도 나섰다"며 웃었다.
정종복 후보 사무실은 경주와 포항을 잇는 7번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목장갑 낀 정 후보가 연탄 나르는 사진 위로'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는 읍소가 짠하다. 경주는 시장통 아줌마들의 입심과 노인정 촌로들의 평판이 선거를 좌우하는 곳이라고 한다.
'정권 실세'란 세평이 "건방지다" "뻣뻣하다"는 입방아를 만나면 되려 역효과를 내는 곳이 경주란다. 빽빽한 기와집, 천년 전 무덤…, 이런 것들과 공존해 온 이곳 사람들 자존심이 간단치 않아 보였다.
정 후보 측 관계자는 "서울에서 대선 치르고 내려 와보니 어느새 '뿔 없는 도깨비'가 되 있더라"며 쓰게 웃었다. 그래서 정 후보가 지난해 말부터 한 것은 허리 를 바짝 숙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경주역 앞에 줄 선 택시 기사들에게 정 후보 얘기를 꺼내자 대뜸 욕부터 하는 이들과, "그 사람이 머 잘못한 게 있노"라는 이들이 뒤섞인다. "그래도 이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이라고 한 40대 택시기사는 말했다.
정 후보 사무실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무소속 예비후보 정수성씨의 사무실이 있다. 벽면은 온통 박근혜 전 대표 사진이다. '박근혜님과 함께 새시대를 열어가겠다'는 다짐이 플래카드 위에 출렁였다.
"박근혜 그라면 여 사람들은 껌뻑 죽는다"는 말로 시작한 공무원 이모(55)씨의 지역 정서 해설은 "신라 이래 경주에 신경 써 준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한 데다 상대적으로 노인이 많아서"라는 원인 분석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인 이웃 포항과의 묘한 경쟁심도 친박 정서를 떠받치는 듯했다.
이런 정서는 박 전 대표가 출판기념회에 한번 다녀갔다는 이유만으로 정씨를 단번에 유력 후보로 올려 놓았다. 정씨 사무실 인근 50대 식당 여주인의 토로가 솔직하다. "정수성이 누군지 아나. 박근혜 보고 좋은 사람인가 보다 하는 거지."
4월이 오면 경주에선 친박 정서와 지역 발전의 희망이 한바탕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황오동 한 부동산에 모여 앉은 주민들 간 담소 끝 논쟁이 그랬다. 초로의 부동산업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소속 뽑아 봐야 도움되는 것 하나도 없다. 여기를 발전시킬 여당 실세가 돼야지." 맞은편 사람이 대거리 했다."발전? 무슨 대통령 재선거 하나? 국회의원 하나가 발전시킬 것 같으면 벌써 발전했지."
경주=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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