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사랑과 배려의 메시지는 조문객의 가슴에 영원히 남았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 나흘째인 19일 서울 명동성당에는 새벽 4시부터 조문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5시 입관 예식이 끝나면 추기경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조문 시작 10분 전인 오전 5시50분께 이미 행렬은 명동성당 들머리와 삼일로, 명동역을 지나 명동 밀레오레까지 3㎞ 가량 길게 늘어섰고, 이날 밤 12시까지 13만 8,000여명의 인파가 명동성당을 찾았다. 명동성당에 따르면 선종일인 16일 1,500명이던 조문객은 17일 9만5,000명, 18일 15만2,500명으로 늘어 이날 40만 명에 육박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시신 염습이 끝난 오후 5시께. 눈발이 날리는 대성전 주위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유리관 대신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삼나무관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성호를 긋거나 합장을 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이날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고민자(56)씨는 "추기경을 다시 못 뵙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불교 신자라는 한영숙(64)씨도 "관이 닫히는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큰 어르신을 잃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이날도 서울은 물론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 등 전국에서 시민들이 모였다. 충남 천안에서 중1ㆍ3 남매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온 김명희(42)씨는 "추기경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했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훌륭한 교육의 장이 될 것 같아 아이들과 명동역에서부터만 3시간30분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KTX를 타고 왔다는 전희정(45)씨는 "추기경의 뜻에 따라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게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오후 4시부터 시신 염습을 위해 1시간 이상 조문이 중단됐지만 소란이나 새치기 같은 무질서는 전혀 없었다. 대신 대형스크린을 통해 추기경의 생전 모습을 지켜보며 묵주 기도와 성모송(誦)을 부르는 등 명동성당의 시민들은 하나가 됐다.
최진자(58)씨는 이틀째 네 살 동갑내기 외손자들을 데리고 경기 부천에서 지하철로 명동성당을 찾았다. 그는 "천주교 신자였던 큰 오빠가 그리워져서 나왔다"고 말했다. 대학 교수였던 최씨의 오빠는 교통사고로 49세 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진눈깨비가 내리자 옆에 있던 한 시민은 최씨와 손주들에게 자신의 노란 우산을 씌워줬다.
스크린을 지켜보던 한 40대 남성은 "추기경이 생전에 '등대지기'를 부르던 모습을 보니,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가사처럼 추기경은 우리 시대의 등대였다"라고 말했다.
휴가를 나왔다는 송모 상병도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냈다"고 말했다. 한 50대 여성은 유리관 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며 통곡하다 자원봉사자에 이끌려 나오기도 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박태준 전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의 조문도 이어졌다. 박 전 의장은 "인자하셨던 그 분의 뜻이 대한민국에 널리 퍼져서 밝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총리도 "항상 나라 걱정, 국민 걱정 뿐이셨다. 한 10년 더 사셨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스발도 파딜랴 주한 교황청 대사는 "그 분 앞에 서면 항상 겸손해지곤 했다"고 애도했다.
해인사 원택 스님은 "정신적 지도자였던 추기경님께서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굽어살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 등이 조문했다. 한국일보 이종승 사장과 장명수 고문 등 언론계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씨, 탤런트 김혜숙 양미경씨, 가수 최희준씨 등도 명동성당을 찾았다.
조문 행렬 주변에는 추기경의 남긴 사랑과 배려의 '바이러스'가 퍼졌다. 상인들은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조문객들을 위해 화장실을 개방했고, 따뜻한 차를 건네는 자원 봉사자들도 부쩍 늘었다.
사랑과 배려가 가득했던 명동성당은 추기경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처럼 '아쉬울 것이 없는' 화합의 마당이었다.
장재용기자
이대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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