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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6> 음악과 결혼한 박춘석의 80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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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6> 음악과 결혼한 박춘석의 80평생

입력
2009.02.1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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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해방된 다음해 어느 날 저녁, 명동에 있는 미군 전용 업소인 '황금 댄스홀' 무대 위에 16살짜리 경기중학교 4학년(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박박 깍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털모자를 눌러 썼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고등학생인줄 몰랐다. 미군들은 엄토미의 클라리넷, 최상용의 트럼펫, 이진용의 드럼과 소년의 피아노 음악에 맞춰 춤을 즐기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박춘석이 프로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순간이다. 그 당시에는 피아노가 별로 많지 않아서 연주할 때마다 트럭에 싣고 다녀야 했는데 박춘석도 자기 집에 있는 피아노를 가져와서 연주를 했다. 따라서 무겁고 큰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내리는 작업이 큰 일 중의 하나였다.

나이 어린 박춘석이 음악계에 나서게 된 것은 우리나라 재즈 피아니스트 1호인 임근식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은 것이 계기가 된다. 그는 그 후 은성 살롱과 미군부대에서 연주를 했고, 박춘석 악단을 이끌면서 미국 팝송을 편곡하여 번안 가요를 많이 만들었다. 미군부대에서 연주할 때 백일희라는 여가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이 박춘석에게 첫 사랑이다.

미국가수 '페기 리'를 좋아해서 백일희라는 예명을 갖게된 그녀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동생이다. 박춘석은 백일희에게 여러 곡의 번안가요를 만들어주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라든가, 훗날 패티김이 부른 'Till'도 그녀가 불렀다. 박춘석은 그녀를 무척 사랑 했다. 그러나 백일희는 그 무렵 미군장교와 사랑에 빠져 결혼 한 후 미국으로 가고 만다. 박춘석에게는 크나큰 상처였다.

고집이 세고 외골수적인 박춘석으로서는 더 이상 사랑을 할 수가 없었다고 동생이며 역시 작곡가인 박금석이 증언 했다. "형은 내가 잘 압니다. 다시는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그를 놓고 많은 루머가 돌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춘석은 서울 중구 충무로 3가에 있는 아담한 2층집에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정말로 많은 노래를 생산했다. 가수생활 50년을 맞은 이미자가 가장 아끼는 노래로서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3곡을 꼽았는데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가 이 충무로 집에서 박춘석이 작곡한 것이다.

그가 전세로 살던 이 집은 우리나라 근대 대중가요의 산실이었다. 항상 가수들, 작사 작곡가들, 방송 PD들, 신문 잡지 기자들이 살다시피 했다. 박춘석은 2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작곡을 했고, 아래층은 항상 손님들 차지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으나 위스키 종류를 좋아 했는데, 문제는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것이다. 피아노 건반은 담배 불로 타 있고, 악보를 태우기 일수였다.

1966년 어느 날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 사장이 박춘석씨 집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남진이 지구레코드사에 전속이 된 기념으로 새 노래를 작곡하는데 와서 들어 보고 평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2층 작곡실에는 임사장, 박춘석, 작사가 정두수, 그리고 가수 남진 등이 와 있었다.

나는 박춘석의 피아노 반주에 남진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아주 좋은 평을 해 주었다. 노래가 쉽고 감상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제목이 너무 옛날식이어서 고치자는 제안을 했다. 작사자 정두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낙도가는 연락선'이라는 제목은 시대에 맞지 않으니 바꾸자고 했더니 정두수도 나한테 좋은 제목을 달아 달라고 해서 내가 즉석에서 만들어 준 것이 '가슴 아프게'였다.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했고 우리나라 가요계에 신바람을 넣어 준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는 박춘석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개인적으로 속이 상한일이 있으면 그는 나한테 전화를 해서 상의를 했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곤 했다.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그의 노래를 한곡이라도 취입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김치캐츠, 패티김, 안다성, 이미자, 남진, 박재란, 문주란, 은방울자매 등등 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손인호가 부른 '비내리는 호남선', 최갑석이 부른 '삼팔선의 봄',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패티김의 '초우', 곽순옥의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주옥같은 노래를 그는 작곡해냈다.

그러던 그가 199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를 한다. 어쩌면 첫사랑 백일희와의 헤어짐보다 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쇼크를 받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다. 며칠 후에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젊었을 때 그토록 좋아 했던 담배를 멀리하지 못한 탓으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투병중이다. 나는 지난 2월 10일, 그가 요양 중인 길동의 한 아파트에 가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가 나를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손을 꽉 쥐고 초점 흐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를 보고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요를 작곡하고 가장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스타 작곡가의 삶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매우 아팠다. 그가 키워낸 많은 가수들은 지금도 활동을 하며 부를 누리고 있는데 정작 그들의 멘토인 박춘석은 15년간 병석에서 외로이 투병을 하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다.

박춘석은 1930년생이고 서울 토박이다. 본명은 박의병인데 부친이 춘석이라는 아명을 지었으며 그 이름이 오늘 날까지 예명으로 쓰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과 함께 했기에 그에게 노래는 생명이다. 지금은 휠체어에 앉아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음악을 위해 벌떡 일어나서 피아노 앞에 앉기를 기대해 본다.

상명대 석좌교수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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