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국민 샹송가수'로 80세를 훨씬 넘은 고령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샤를 아즈나부르가 대사 직을 맡아 화제를 낳고 있다.
교도 통신, 러시아 인테르팍스와 이타르 타스 통신 온라인판은 16일 아즈나부르가 어머니 모국인 아르메니아의 스위스 주재 대사에 취임한다고 보도했다.
아즈나부르는 아르메니아 TV와 인터뷰에서 대사 임명에 대해 "막중한 임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조국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 모두에게도 큰 일이라고 생각을 고쳐 먹고 기꺼이 수락하기로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르메니아의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이 아즈나부르에게 직접 스위스 대사를 맡아줄 것을 거듭 정중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1924년 5월 파리에서 그루지야 태생의 아버지와 터키계 아르메니아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했다. 부모는 미국행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던 중 사귀어 결혼했다고 한다.
아즈나부르는 가수활동을 하면서도 프랑스 내 40만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이주민 사회와도 끈끈한 유대를 맺어왔으며 자신이 아르메니아계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난 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2만5,000명이 목숨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모금 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직접 자선단체를 세우고 구호지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2002년에는 1915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다룬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아르메니아와 관련 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또한 그는 아르메니아의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상임대표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아즈나부르의 헌신적인 '모국 사랑'에 보답해 아르메니아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국민 영웅' 칭호를 선사했고 작년에는 아르메니아 국적까지 부여했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아즈나부르는 이전부터 대사 취임을 요청받았으나 "활동 자유를 잃고 정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도 못하고 난처해 진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아즈나부르의 부모는 재능 많은 그를 어려서부터 무대에 세웠으며 9살 때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당대 최고의 인기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에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피아프의 프랑스와 미국 순회공연에 참여하면서 지명도가 급상승했다.
<라보엠> , <라 맘마> , <이자벨> , <레이> , <귀여운 꽃> , <포 미 포미더블> 등 주옥 같은 사랑의 노래 1,000곡 이상을 만든 싱어송라이터 아즈나부르는 프랑스 가수로는 처음으로 프래티넘 셀러를 기록했다. 5개 국어로 작품을 발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샹송가수로 수십년 동안 군림했다. 포> 귀여운> 레이> 이자벨> 라> 라보엠>
전세계적으로 1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아즈나부르는 차분하지만 애절하고 깊은 슬픔이 배인 분위기 있는 창법으로 국내에 많은 올드팬을 두고 있다.
아즈나부르는 느벨 바그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쏴라> 를 비롯해 <라인의 가교> , <지옥의 결사대> 등 60여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지옥의> 라인의> 피아니스트를>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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