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를 흔히 ‘세터의 놀음’이라고 표현한다. 공격수들의 화끈한 스파이크와 센터들의 전광석화 같은 속공도 세터의 손을 거쳐야 가능하고, 세터의 활약상은 곧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경기의 흐름 역시 세터의 손놀림에 따라 흐르기에 팬들도 세터의 동작 하나 하나를 쫓게 된다. 243㎝의 네트 위를 지배하며 팀의 승패를 좌우하는 ‘마법의 손’을 가진 ‘세터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팀 전력의 40%를 차지하는 ‘엄마’
세터는 선수들 사이에서 ‘엄마’라고 불린다.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구심점으로서 세터는 동료들과 고루 어울리며 융화에 힘써야 한다. 역대 최고의 세터로 꼽히는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이 국내 1인자로 인정한 세터 최태웅(삼성화재)은 “엄마처럼 팀에서 선수들을 감싸주는 한편 화도 내야 하는 게 세터의 임무다. 한 가정의 살림꾼인 엄마처럼 세터도 팀의 살림꾼”이라고 설명했다.
‘엄마’의 가치를 수치로 측정할 수 없겠지만 세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은 “세터는 팀 전력의 40%를 차지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감독이 공격 플레이를 지시하지만 마지막 판단은 전적으로 세터의 몫이다. 세터는 당일 선수들의 컨디션 파악은 물론 수신호를 통해 동료들의 움직임까지 지휘해야 한다”며 “공격수가 아무리 좋아도 세터가 흔들리면 경기를 이길 수 없다”고 세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팀내에서 막중한 비중을 지닌 세터이기에 감독의 수족이 되기도 한다. 세터는 팀에서 감독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나간다. 구단에서 세터가 감독의 수족이다 보니 쏟는 공도 엄청나다.
사령탑들은 기술과 전략은 물론 마음을 다스리는 법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세터 전담코치를 둬야 하는 게 정석이라고 입을 모은다. 감독들의 말처럼 세터는 ‘팀의 10년 농사’를 좌지우지한다고 하니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멋 부리면 욕만 먹어
세터의 유형은 크게 ‘멋내기형’과 ‘팀플레이형’ 두 가지로 나뉜다. ‘멋내기형’이 세터의 재간과 실력에 의존하는 유형이라면 ‘팀플레이형’은 감독의 작전을 바탕으로 팀플레이 위주의 토스워크를 올리는 스타일이다. 보통 세터들은 ‘멋내기형’으로 시작했다가 ‘팀플레이형’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현역 최고의 세터로 꼽히는 최태웅 역시 젊은 시절에는 속공과 노블로킹을 만들어주는 토스에 희열을 느끼는 등 멋내기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신 감독을 만난 이후 사령탑의 지시대로 경기를 풀어나가면서 안정감을 주는 팀플레이 중시형으로 바뀌었다.
현대캐피탈을 이끌고 있는 김 감독도 세터의 안정감을 최우선 덕목으로 꼽았다. 그는 “세터는 리더로서 팀 컬러에 맞는 정확한 볼 배급으로 안정감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세터의 신체 조건에 대해선 “키가 크면 블로킹과 서브 등 다방면적으로 좋겠지만 키가 작은 선수일수록 토스가 빠르기 때문에 감각과 센스로 단신의 약점을 메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세터는 경기 중 공을 만지는 횟수가 가장 많다. 하루 평균 100회 정도의 토스를 올린다. 연중 연습과 경기가 없는 2개월을 제외한다고 해도 세터는 3만4,000번의 토스를 매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루에 100번의 토스를 올려야 하니 성실성과 인내심 없이는 공격수에게 안성맞춤의 공을 띄울 수 없다.
게다가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게 ‘세터의 숙명’. 세터가 돋보였다는 건 세터가 팀플레이보다 화려한 토스워크에 치중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신 감독은 “팀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게 바로 세터다. 팀이 이겼을 때는 공격수들에게 공이 돌아가지만 반대일 때는 세터의 실수로 치부되기 일쑤”라고 어쩔 수 없는 세터의 숙명을 설명했다.
김두용 기자 enjoyspo@hk.co.kr
■ 세터 어떻게 공격 지휘하나
세터는 ‘코트의 지휘관’답게 감독 지시를 귀 담아 들으면서 동료 컨디션도 살펴야 한다. 하지만 동료에게 눈치를 가장 많이 받는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배구 선수들 사이에서 ‘내기를 하더라도 세터 돈은 따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세터가 스파이크를 때릴 공격수를 결정하기에 공격수들은 항상 세터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다. 공격수들이 세터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건 사실이다.
팀 동료뿐 아니라 상대팀의 선수들도 세터의 눈치를 보는 건 매한가지다. 세터는 상대가 서브를 하기 전에 팀 동료들을 향해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공격 플레이를 지시한다.
속공과 시간차, 오픈 공격 등은 세터의 수신호에 따라 결정된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에 포수가 사인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격 패턴이 다양하다 보니 세터가 보내는 수신호만 약 12가지에 달한다. 손가락 5개를 활용해 두 번의 동작을 취하는 등 수신호의 방법은 복잡하다.
삼성화재 최태웅은 “사인을 보는 건 엄연히 반칙이다. 하지만 꼭 수신호를 엿보며 이를 활용하는 선수들이 있어 얄밉다. 그래서 수신호를 수시로 바꾼다”고 말했다.
아군과 적군을 동시에 살펴야 하는 세터는 강철 체력과 함께 두뇌 회전까지 빠른 ‘팔방미인’이 돼야 한다.
김두용 기자 enjoysp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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