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를 이용해 독특한 질감과 공간 개념을 선보여 온 전광영(65)씨는 최근 세계 무대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한국 미술가다.
지난해 9~10월 세계 10대 화랑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뉴욕 로버트 밀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지난해 12월부터는 유명 미술관인 코네티컷 얼드리치 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이 진행 중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전시를 "인스턴트 시대에 너무나 자주 간과되는 위대한 예술의 근본을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그리고 일본 도쿄의 대표적 미술관으로 관광 명소인 롯폰기힐스에 자리한 모리미술관 내 모리아트센터에서도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4일 개막해 3월 15일까지 한 달간 이어지는 이 전시는 52층 전체 3개홀을 사용하는 대규모로, 전씨의 평면과 입체작품 31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 작가로는 전례가 없는 대접을 받고 있다.
전시 개막일 모리아트센터에서 만난 전씨는 "정말 오래 별렀던 기회인 만큼 상당히 흥분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일본 측의 전시 초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뭔가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도쿄의 중심인 모리아트센터에서 전시를 하게 된 만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자 각별히 신경썼습니다."
전씨는 자신의 작품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에 대해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며,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원 홍천 출신인 그는 어린시절 한의원을 하는 큰아버지집에서 보았던,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한약봉지에서 착안한 작업을 하고 있다.
고서(古書)의 한지로 싼 무수한 삼각형의 스티로폼들이 화면 가득 쌓여 마치 우주 같은 신비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집합(Aggregation)' 시리즈다.
고서를 통해 작가는 그 책들을 만지고 읽었던 수많은 영혼의 숨결과 지문을 되살려내고, 스티로폼을 한지로 싸는 작업으로 한국의 보자기 문화를 상징한다.
"서양의 박스 문화는 100온스짜리 박스에 10온스짜리 박스 10개가 들어가면 더 이상 넣을 수 없지요. 하지만 친정에 다녀가는 딸을 불러세운 어머니가 이미 가득찬 보자기에 뭔가를 한 움큼 쑤셔넣으면 또 들어갑니다. 정말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누는,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정이죠."
전시장의 맨 앞에는 전씨의 1970년대 유화 작품들이 걸렸다. 1990년대 중반 시작한 한지 작업의 바탕이 된 이 작품들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지금껏 작가가 간직하고 있던 것들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 다음부터 전씨의 오랜 무명 시절을 끝나게 한 '집합'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특유의 모노톤 작품부터 푸른색과 붉은색 등 색감을 도입한 최근 작업까지 다양하다. 어두운 화면 속에 작가가 파놓은 푸른 분화구는 인간 문명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두번째 홀에는 두 점의 거대한 입체 작품이 마주보고 있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3m 높이 작품은 현대인을 꾸짖는 조상들의 고뇌하는 두상이며, 그 옆에는 숯검댕이처럼 타버린 심장의 형상이 4m 길이로 누워있다. 8개의 평면 작품을 십자가 모양으로 결합시켜 입체로 확장시킨 작품도 일본 관람객들의 시선을 오래 잡았다.
전시 개막행사는 다케나카 헤이조 전 일본 경제재정상, 권철현 주일대사, 천정배 민주당 의원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고, 아사히신문 등 현지 언론 20여곳도 취재를 나왔다.
전광영씨의 전속 화랑인 더컬럼스갤러리의 장동조 대표는 "해외 딜러들을 만나보면 이우환은 일본 작가, 백남준은 독일 작가로 안다. 그런데 전광영 선생은 한국 토종 작가로서 한국의 정서를 가지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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