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비극의 조건은 무엇일까. 고향을 상실한 유민으로서의 운명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과 재화의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덮어쓴 현실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보편의 폭력적인 본성이거나 현실을 외면한 채 허상에 고착하고자 하는 어리석음 때문인가.
폴란드 출신 미국 작가 야누시 그오바츠키의 1992년 작 '뉴욕 안티고네'(이옥진 번역, 이성열 연출)는 시종 묻는다.
뉴욕 한 공원에 깃들여 사는 세 노숙인의 사연을 보여주는 이 극은 '길 위의 삶'에 드리운 다양한 폭력들을 암시하는 예화로 채워간다. 약탈에 대비해 빈털터리임을 알리려고 사샤(김동완)가 주머니 속 실밥을 뜯는 첫 장면부터 노숙인끼리의 살인과 장기 이식, 심리적 폭력, 성폭력 등이 그들의 삶을 훼손한다.
여기에 추위 같은 자연의 무자비한 폭력까지 그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공원을 순찰하는 경찰관(정만식)이 극을 여닫고 장면 사이를 메우며 시간의 경과를 해결한다. 아메리칸 드림 예찬과 성실한 직업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무지한 채로 '공권력'이라는 공인된 폭력을 행사한다.
이 극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는 아니타(정은경)만이 유일하게 인간다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타인의 꿈에 귀 기울이는 그녀의 노력은 삶의 사악한 관성과 습관 앞에서 물거품이 된다. 극의 제목이 '뉴욕 안티고네'인 것은 아니타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와 같은 '매장'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신사도를 보여준 노숙인 남자의 주검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20달러 채 못 되는) 전 재산을 걸고, 알코올중독자 노숙인 두 사내에게 무연고자 무덤에서 시신을 빼돌려달라는 제안을 한다.
체호프와 유미리 작품의 극중 인물들처럼 잘못된 상황 앞에서 망상을 고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간 연출가 이성열이 해 온 '현대 비극' 테마의 연장선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패러디의 유희성과 해체적 리듬감으로, 또는 표현주의적 무대를 빌어 다소 서정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삽화로 그려낸 그간의 적극적인 연출방식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오직 배우의 연기 역량에 극의 흐름을 맡긴다.
공원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알코올중독자 사샤 내면의 이명 또는 환청처럼 느끼도록 강조한 장면과 막간에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노숙자 사진을 투사하는 정도로만 관여했다.
무대는 벤치와 드럼통, 관목 한 그루 등 최소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극은 배우들이 구축해가는 캐릭터에 의해 완성되도록 맡겨진다. 변덕스럽고 야비하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간질환자 '벼룩'을 생생하게 구현해낸 박완규가 그 의도를 십분 살린다. 3월 1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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