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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담배 한 대 필 시간의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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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담배 한 대 필 시간의 몽상'

입력
2009.02.19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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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 연구> (곽광수, 김현 지음ㆍ민음사 발행ㆍ1976)는 내 책꽂이의 가장 좋은 위치에 꽂힌 가장 허름한 책이라서 눈에 띈다. 어쩌면 내게만 눈에 띄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도서관 서가였다. 84년쯤이었을까. '운동권' 학습서들 속에서 바슐라르 책들을 읽다가 <바슐라르 연구> 라는 책에 이르렀다. 도서관 책이었는데 읽고 나니 갖고 싶어졌다. 구내서점에서부터 수소문했다. 절판되었다는 얘기가 거듭될수록 꼭 가져야만 하는 책이 되어 있었다. 신촌 일대의 서점들을 순례했으나 허탕이었다. 그때, "저기요" 하며 한 남자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며 2층 커피숍을 가리켰다.

남자가 얘기를 시작했다. 신분이 낮은 남자가 신분이 높은 여자를 짝사랑했단다. 신분이 달라 만날 수조차 없었단다. 어느 날 천우신조처럼 여자와 맞닥뜨린 남자는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고 했단다. 담배 한 대가 타들어간 시간은 짧았고, 여자는 떠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단다. 남자는 긴 담배를 만들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여전히 여자를 잊지 못해 수소문했으나 여자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단다.

남자는 모 대학 경제학과 3학년 OOO(이름은 잊었다!)이라며 자기를 소개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남자의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담배 한 대 다 피우셨죠?"라며 커피숍을 나왔다. 버스정거장까지 따라온 남자가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파리다방도, 2층 커피숍도, 신촌 일대의 서점들도 죄다 없어졌다. 그때 그 시절 그리 책들에 빠져 살지 않았더라면 '다음 주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 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파리다방이 아닌 도서관에서, 헌책방에서 가까스로 구했던 <바슐라르 연구> 를 다시 읽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삶과 다르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바슐라르 연구> 가 아니었더라면, 내게는 '담배 한 대의 몽상'도, '가지 못한 파리다방의 몽상'도 없었을 것이다.

정끝별 시인ㆍ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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