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많은 비밀 편지를 정치에 이용한 군주는 세계 정치사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299통. 새로 발견된 이 편지들은 정조와 관련된 숱한 의문을 푸는 열쇠가 될 전망이다. 동시에 이 편지 뭉치는 정조와 조선시대에 대한 새로운 의문들도 함께 제기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임금인 정조가 왜 그토록 많은 편지를 썼느냐, 하는 것이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기 전에도 정조의 편지는 대략 200통 정도가 남아 있었다. 수신인은 외사촌 홍취영(1759~?), 남인의 영수 채제공(1720~1799) 등 친인척이나 지근거리에서 정조를 보좌한 신하였다.
이 편지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등에 낱장이나 어찰첩의 형태로 보관돼 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은 2004년 소장 중인 39통의 어찰을 번역해 <정조대왕의 편지글> 이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정조대왕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의 발굴로 현전하는 정조의 어찰은 배 이상 늘어나게 됐으며, 정조가 한 신하에게 쓴 편지만 300통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재위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편지를 썼던 군주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정조가 이처럼 많은 양의 편지를 쓴 까닭은 무엇일까. 두 갈래로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는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내밀한 편지를 보낸 것이, 조선왕조사에 비춰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문화사를 전공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편지를 쓰는 것은 왕의 자유로, 얼마든지 사신(私信)을 보낼 수 있었다"며 "지금 대통령이 개인적인 전화 통화를 하듯, 조선의 임금도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을 통하지 않고 사적인 교류를 가졌다"고 말했다.
정조가 많게는 하루에 10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편지 외에는 다른 개인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없던 당시에는 통상적인 일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론이다.
정조가 여러 차례 편지에 쓴 '보는 즉시 없애라'는 명도 전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효종(1619~1659)이 당시 이조판서 송시열(1607~1689)과 북벌(北伐)을 논의할 때도 편지를 이용했는데, 거기에는 파기할 것을 요구하는 효종의 명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송시열은 그 편지들을 대부분 파기하고 일부만 남겼는데, 사서에는 송시열이 남긴 편지에 대해 '이것들은 주상이 없애라고 명하지 않으셨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효종과 정조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전제왕조 국가에서 공식화하지 않은 왕의 의사 표현은 보안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299통의 편지 발견은 정조의 편지를 통한 독특한 '어찰(御札) 통치' 스타일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강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정조는 심환지뿐 아니라 많은 대신들과 편지를 교환했다"며 "정조는 구중궁궐에 앉아서 거의 날마다 편지로 국정행위의 상당 부분을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정조는 반대세력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위협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때 편지를 막후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와 같은 성격의 편지를, 각 정파에 끊임없이 보내 서로의 정보를 캐고 또 견제케 했다는 해석이다.
이런 추론이 맞다면 정조는 모든 신하들이 참여하는 개방된 네트워크보다는 각 정파와의 단일 채널을 자신이 독점하는 폐쇄적 통치 스타일을 선호한 군주로 파악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식적 조서 형태보다는 비밀이 유지되는 편지 형태로 명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했던 노론 벽파의 심환지에게, 많게는 하루에 4통이나 되는 편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풀리는 부분이다. 안 교수는 "군자학이나 성학론의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정조의 모습이 이번에 발견된 편지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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