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미자 노래 인생 50년/ "恨과 기품… 우리 노래 뿌리 잇고 싶었어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미자 노래 인생 50년/ "恨과 기품… 우리 노래 뿌리 잇고 싶었어요"

입력
2009.02.11 02:02
0 0

올해로 데뷔 50년을 맞은 이미자(68)는 현대사를 지나쳐간 수많은 다른 대중가수들과 경계선을 또렷이 긋는다. 스스로 '한국 여성의 한'을 노래했다고 회상하는 그에겐 의외로 통속가수라고 할 만한 이미지가 별로 없다. 그가 노래한 것은 대중가요지만 그 통속적인 노래들은 반세기 동안 이땅의 수많은 가슴을 적시면서 영원한 클래식으로 거듭났다.

9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마주한 그는 검은 정장에 검은 머리로 단장했다. 열 아홉의 순수함 위에 그대로 내려 앉은 연륜의 무게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무르익은 '동백'이었다.

"동백아가씨가 나온 이후 서구풍의 리듬과 음악이 많이 유행했어요. 사람들은 지성인이 만약 이미자의 노래를 부르면 '질이 낮다'고 깔보기도 했죠. 이 정도로 제 노래가 촌스러운 노래로 못이 박혔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잠시 스타일을 발라드로 바꿀까도 생각했는데, 사실 전 그럴 용기도, 소질도 없었어요."

50주년을 기념해 발매하는 앨범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10일 발매된 이 앨범엔 그의 히트곡 70곡과 자신의 삶을 그린 신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은', 그리고 전통가요 30곡이 실렸다.

"우리 가요의 뿌리를 제가 이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101곡이 들어간 이 앨범 중 30곡의 전통가요를 함께 실었어요. 제 히트곡 만으로 꾸미지 않았어요. 우리 전통가요가 일본에서 온 것이라고들 하는데 우리 노래엔 그들 노래와 달리 한이 서려 있어요. 기품이 있죠."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자 곧바로 금지곡의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동백아가씨', '섬마을선생님', '기러기아빠'입니다.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20년 이상을 맘대로 부르지 못하고 구할 수도 없었던 역경의 기억이죠. 그 노래들이 해금된 후 어딜 가더라도 꼭 이 세곡은 빼놓지 않고 불러요."

과연 이 곡들이 금지되지 않았다면 이미자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이미자는 '어려운 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것이라 어떻게 다를지 떠오르지 않네요. 가장 애착이 가는 곡들을 부르지 못하고 지내온 것만 생각해도 힘들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요. 1987년에 해금됐을 때에는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이어서 30주년 기념공연을 할 때서야 비로소 기쁜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 동안 많은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듯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금지된 곡임에도 이미자를 청와대로 불러 '동백아가씨'를 청하곤 했다.

"금지곡인지 모르셨죠. 그 밑에 계신 분들만 알고 있었나 봐요. 박 대통령 뿐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도 좋아해주시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많이 사랑해 주셨어요. 김종필 총재님은 '섬마을선생님'을 아코디언으로 전주, 후주까지 오리지널로 연주해주시곤 했어요. 어려운 자리에 서서 부르려니 그 때가 어땠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이미자는 여러 친분 있는 정계 인사들 중에서 특히 고건 전 서울시장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30주년 기념공연을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분이죠. 정말 많이 도와주셨죠. 지금도 잊을 수 없고요. 이후로 사모님과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어요. 다른 정치인 분들은 다 대통령 되고 총리 되셔서 뵐 수가 없었죠."

가수로서의 삶 이외 여자, 개인 이미자로서의 삶에 만족하는지를 물었다. "여자로서의 인생도 과분하게 잘 지냈어요. 가수로서의 인생 만큼이나요. 초년에 실패가 있었지만 곧 이룬 가정에서 연예인으로서의 삶에 못지않은 튼튼하고 건전한 생활을 이뤄냈어요." 하지만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딸에 대한 질문엔 끝내 답하지 않았다.

가요계의 원로로서 이미자는 흥미 위주, 가벼워지는 가요 풍토에 대해 따끔한 한 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가수는 정석을 떠나지 말고 가사전달을 잘해야 해요. 음의 전달은 물론이고요. 요즘 유행이 가사전달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중가요들이 모두 흥만 추구하는 것 같아요. 가요는 기쁨은 물론 아픔도 전해야 하는데…. 아무리 잘 사는 시대가 됐지만 울고 싶고, 어려운 사정은 여전히 있습니다. 후배 가수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많은 노래를 해주기 바랍니다."

자신의 변함없는 목소리에 대해 "예전에 비해 카랑카랑한 맛은 덜하지만 표현하는 음역은 넓어졌다"고 말하는 이미자. 스스로 은퇴의 경계를 정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제가 부른 노래들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다시 배워야 할 노래도 많을 걸요. 꿈이랄까. 딱히 그런 건 없어요. 단지 주어진 스케줄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것 만이 50년을 사랑해 준 팬들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어요. 팬들이 찾아주는 한 은퇴는 없습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이미자의 앨범과 노래/ 총 2070곡 발표… 기네스북 올라

이미자는 데뷔 이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앨범과 노래를 출시한 가수로 이미 1990년 기네스북(2,070여곡)에 이름을 올렸다. 발표곡 수가 이 정도이다 보니 히트곡 수도 400여 개를 헤아린다. 그래서 요즘 공연무대에서 2시간 가량을 오직 히트곡 만으로 채울 수 있는 가수는 이미자와 조용필 뿐이라는 말도 있다.

나이 열 아홉이던 1959년에 내놓은 '열아홉순정'(나화랑 작곡)으로 시작된 이미자의 히트 릴레이는 1964년 만삭의 몸으로 녹음한 '동백아가씨'(백영호 작곡)의 빅히트(전국 판매 100만 장)로 이어졌다.

이어 미8군 음악에서 트롯으로 대중음악의 주류가 옮아간 1960년대 중반 이후엔 국내 최고의 메이저 음반사인 지구레코드사와 손을 잡고, 작곡가 박춘석을 만나면서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등으로 절정을 이뤘다.

역시 1960년대 말 발표된 백영호의 '여자의 일생', '서울이여 안녕' 등도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심금을 울린 히트곡으로 자리 잡았다. 이미자의 히트곡은 일반 앨범 뿐 아니라 '여로'(백영호 작곡)등 500여 개 TV드라마, 영화, 라디오드라마 속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엘레지의 여왕으로 칭송 받으며 국민가수로 성장한 그이지만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 대표곡들이 1965년 이후 금지곡이 되면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동백아가씨'는 일본에서 1966년에 '사랑의 붉은 등불'로 이름이 바뀌어 출시됐는데,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물결 속에서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7년에 이르러 '동백아가씨' 등이 해금조치 되었고 1989년엔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히트곡들을 부른 이미자는 1997년엔 자신의 히트곡 '흑산도아가씨'노래비가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세워지는 영예도 안았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기고/ 주름진 개발시대 견뎌 온 한국 여인들을 위한 哀歌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노래는 경제 개발과 성장의 기치를 높이던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1964년 '동백아가씨' 한 곡으로도 알 수 있듯 일터로 나간 남자들을 위해 인내하며 가정을 지킨 눈물과 한숨의 여심이 그의 음악세계를 뒤덮고 있다.

영롱하고 구슬픈 그의 노래로 우리 사회는 위안과 위로를 받은 것이다. 이미자의 애가(哀歌)가 없었다면 우리는 당시 사회경제의 성장통을 극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 클래식을 들었어도, 포크 키드였어도 누구나 나이 들어서 끝내는 노래방에서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만다. 거기에 기억해야 할 우리 사회의 이력이 있고, 실제 삶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트로트 음악이 저학력과 가난을 연상시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중가요 장르의 대표적 지위를 지키며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자라는 천재의 활약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미자가 없었다면 1970년대의 하춘화도, 1980년대의 주현미도 심지어 새 천년의 장윤정도 없다. 가수를 떠나서 그를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시킨 위대한 작곡가 박춘석의 음악세계도 이미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전성기에 그는 박춘석뿐 아니라 당대의 모든 일급 작곡가들이 준 악보를 단숨에 살아 꿈틀거리는 노래로 빚어냈다. 그 광대한 소화력과 무궁한 호소력은 지금 들어도 신기하고 각별하다.

그는 대중가요 부르기의 모범적 전형을 확립했다. 이후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타나는, 꺾거나 굴려 부르는 기교와 장식이 이미자 노래에는 전혀 없다. 경이로울 만큼 가진 소리 그대로 순수하게 노래했다.

더구나 활동 5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자연창법'을 고수하고 있다. 일례로 '섬마을 선생님'만 하더라도 취입 때인 1967년에 부른 것이나 지금 부른 것이나 똑같다.

우리가 그토록 오랜 세월 음반, 드라마, 영화를 통해 수많은 이미자 노래를 들었어도 조금도 물리거나 질리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주현미도 인정했듯 가수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미자 노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의 가창패턴과 노래의 영혼이 알게 모르게 후대에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자에게 주어진 '한국 최고의 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은 아직도 유효하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릿?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