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객 책임’서류만 잔뜩… 펀드 설명은 뒷전
#1. 대기업에 다니는 최모(36ㆍ여)씨는 최근 서울 중구의 A은행 지점을 찾아 펀드가입을 하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주식형 펀드에 가입하려 했지만 상품 수가 200개가 넘어 스스로 고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은행 창구에 있는 전문 상담사도 은행이 팔려고 내 놓은 전략 상품 몇 개를 추천하기만 할 뿐 다른 상품에 대한 질문에는 거의 답을 하지 못했다"며 "법만 바뀌었을 뿐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2. 자영업을 하는 김모(43)씨는 B은행 펀드 상담 창구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김씨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자 상담사가 인터넷뱅킹 가입서를 주더니 은행 홈페이지에서 펀드를 직접 고르라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펀드가입 절차는 은행 창구와 동일해 직접 고르면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김씨는 "어렵게 시간을 내서 자세한 설명을 들으려고 은행을 찾았는데 상품 설명은 전화로 문의해 달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자본시장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의 펀드 판매가 위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절차상의 복잡성 때문에 은행들이 '불완전 판매' 논란에서는 벗어났지만, 투자자의 위험이 여전히 높은 '불안전 판매'는 계속됐다.
다양한 펀드 상품을 안전하게 판매해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자본시장법의 원래 취지는 퇴색되고, 은행에 면죄부만 주게 됐다는 비판까지 일고 있다.
■ 고위험 상품에 쏠림현상
가장 큰 문제는 판매하는 펀드 상품이 고위험에 지나치게 몰려 있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상품권유에 앞서 고객의 투자목적, 재산상황 및 투자경험 등의 정보를 확인하고 고객의 투자성향을 안정형, 안정추구형, 위험중립형, 적극투자형, 공격투자형의 5단계로 분류한다.
하지만 펀드 상품이 주식형 펀드인 공격투자형에 60% 가까이 몰려 있어 투자자들이 위험이 높아 분류 자체가 지나치게 형식적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실제 A은행의 경우 안정형이 16개, 안정추구형 65개에 불과한 반면 위험도가 가장 높은 주식형 펀드가 243개로 압도적으로 많다. B은행의 경우에도 안정형과 안정 추구형, 위험 중립형, 적극투자형을 합쳐 100개가 넘지 않지만 공격투자형이 200여개에 달했다.
특히 주식형의 경우 투자 대상과 지역이 수도 없이 다양한데도 위험도를 일괄적으로 동일하다고 평가하는 꼴이어서 투자자 보호에 소홀하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A은행 부지점장은 "자산운용사에서 개발된 상품이 주식형에 몰려있어서 나온 현상"이라면서도 "솔직히 주식형의 경우 워낙 많아 고객들 스스로 판단해 가입하는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 펀드 판매 방식도 과거 관행 못벗어
상품 구성은 물론 펀드 상품 설명과 판매도 과거의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펀드 가입때 까지 고객의 책임을 확인하는 서류만 받아놓고도 정작 펀드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뒷전이었다.
실제 A은행의 경우 주식형 펀드에 가입하려고 하자 은행의 주력 상품인 3가지 펀드에 관련한 팜플렛을 전해 주고 고르라는 것이 다였다. 특히 관심 있는 일부 상품에 대해 문의를 할 경우 "잘 모른다" "알아보고 연락 드리겠다"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B은행의 경우는 투자 목록에 나와 있는 펀드의 차이를 몰라 다시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고, 추천 이유도 "남들이 많이 한다"는 식의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A은행 명동 지점을 찾은 이모(43)씨는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은행들이 전문 펀드 상담사를 두고 설명을 자세하게 해 준다하더니 내가 책임지겠다는 서류만 잔뜩 받아놓고, 정작 펀드 설명은 자사 상품 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은행들이 불완전판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데 만 신경을 쓸 뿐 정작 세부 상품에 대한 투자자 보호와 고객 서비스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투자자 보호와 상품별 설명을 강화할 수 있도록 위험등급 관련 세부 가이드라인을 오는 5월 초까지 만들어 금융권에 제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이현수(숙명여대 3) 인턴기자
● 판매사마다 ‘들쭉날쭉’ 지적
펀드 위험도 분류 권한이 자산운용사로 일원화할 것으로 보인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형식상 '투자자보호'는 두터워졌지만 실제적으로는 판매회사(은행 증권 보험 등)마다 다른 잣대(펀드 위험등급)를 들이대 투자자들이 헷갈리고, 가입할 펀드가 적다는 지적 때문이다.
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투자자들의 혼란을 막기위해 자산운용사가 펀드 위험도 등급을 결정하면, 판매사가 따르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금투협 관계자는 "현재는 펀드 판매사가 자산운용사의 등급과 다르게 제각각 펀드 위험도를 분류할 수 있다 보니 같은 펀드에 대한 등급이 달라지는 경우가 발생한다"며 "이를 통일하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자본시장법은 운용사가 새 펀드를 내놓을 때, 해당 상품의 투자위험 분류를 1~5등급으로 표시한 집합투자증권신고서를 금융감독원에 제출토록 하고 있다.
아울러 판매사는 상품의 위험도를 ▲무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초고위험으로 분류해 고객의 투자성향(5단계)에 맞게 권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은행과 적극적인 성향의 증권사가 내거는 펀드 위험도가 달라 투자자들의 혼선이 불가피했다.
특히 고객이 자신의 투자성향보다 투자 위험도가 높은 펀드에 가입하려면 번거로운 확인절차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은행 고객들의 불만이 높았다.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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