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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5> 재클린과 오나시스 인터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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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5> 재클린과 오나시스 인터뷰 사건

입력
2009.02.11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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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시초프 소련 총리가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UN총회 석상에서 자기 신발을 벗어 연설 탁자를 두드린 사건이 1960년 10월12일에 있었다. 세계는 경악을 했다. 즉시 그에게 ‘악동’이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다. 그는 미국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비웃는 행동을 많이 했다. 심지어 “내가 미국에 와 보니 부러운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더라. 하나는 미국의 고속도로 망이고 또 하나는 재클린 케네디다” 라고 비꼬았다. 그러자 케네디는 “모스크바 크렘린 궁 앞에서 한 남자가 ‘흐루시초프는 돌 머리다’라고 떠들고 다니다가 잡혀서 25년 형을 받았는데 그 죄목 중에 5년은 국가원수 모독죄이고 20년은 국가기밀 누설죄였다”고 받아 쳤다.

65세 밖에 살지 못했고, 미국 대통령 영부인 생활도 3년 미만인 재클린 케네디는 20세기에서 가장 유명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 일 것이다. 조지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12살 연상인 젊은 정치인 존 F 케네디를 만나 결혼을 한 뒤 상류 사교계에서 큰 빛을 발한다. 불행의 그림자는 항상 그녀 곁을 떠나지 않다가 1963년 남편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고 난 후 수많은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더니 1968년 그리스의 선박 왕으로 억만장자이고 23살 연상인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와 전격적으로 결혼했다. 따라서 재클린의 이름도 ‘Jacqueline Lee Bouvier Kennedy Onassis’로 바뀐다.

그리스 국제가요제 참석차 아테네에 머물 당시 재클린과 오나시스가 사는 섬은 아테네로부터 배로 겨우 3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신문기자인 내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때는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971년이었던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취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인터뷰는 불가능하더라도 먼발치에서 사진이라도 찍고 와야 한다고 나는 아주 비장한 각오를 하고 준비를 했다. 전 세계의 많은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배를 전세 내어 그 섬 근처에 카메라를 하루 종일 대놓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촬영에 성공하면 이건 큰 특종인 것이다. 이런 욕심 때문에 수소문 하던 중 호텔의 한 종업원이 오나시스 회사와 관계가 있다는 어떤 사람을 나한테 소개해 주었다.

나는 전날 카페에 갔다가 “영등포, 인천” 어쩌구 하던 녀석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서 매우 찜찜했다. “이거 뭐 또 사기 당하는 거 아냐”하고 걱정이 생겼다. 작곡가 이봉조도 나 보고 “웬만하문 집어 치그라. 그라다가 또 당하문 혈압 올라 간데이” 라며 욕심을 접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문기자가 사기 당할 것이 무서워 취재기획을 중도 포기 한다는 건 비겁한 짓이라는 것을 남들은 모른다. 사기 당하더라도 “나는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신문과 잡지에는 재클린과 오나시스가 바닷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장면 등이 연일 실렸다. 하지만 오나시스의 전용 호화 요트인 크리스티나 호가 정박 해 있는 그들의 천국은 경비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는 접근 할 경우 발포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어서 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나를 안내하게 돼있는 사람은 5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그리스인인데 전날 술값 사기쳤던 녀석하고는 전혀 딴판으로 젠틀하게 생겼다. 비교적 고급영어를 구사하고, 아는 것이 많아 보여서 믿음이 갔다.

그는 오나시스가 선박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공 사업도 하고 있으며 웨스트 에어포트라는 작은 비행장까지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으며 나중에 한국과 학문적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약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니까 그는, 항공 사업 쪽에서 일했던 자기 친구가 오나시스의 섬을 지키는 경비대 책임자니까 걱정 말고 카메라 준비나 잘 해 두라고 나를 안심 시켰다.

섬으로 가기 전날 저녁에 나를 안내할 사람이 호텔로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돈을 요구했다. 3,000 달러를 달라는 것이다. 배도 빌려야 하고 자기 친구인 경비대 책임자에게 인사도 해야 하기때문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3,000 달러는 매우 큰돈이다. 당시 원 달러 환율은 400 대 1 정도였는데 1만 달러, 즉 400만원이면 한국에서 작은 집 한 채 값이었으니까 말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럼 없던 걸로 합시다”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나는 정말로 답답했다. 달러를 넉넉하게 가져 온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신용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돈을 꿀만한 데도 없고.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한국일보 본사에 전화를 해서 취재비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송금이 여의치도 않았고, 더구나 전화 瑩ㅐ?아주 형편없었다. 이것 참 큰 일 났다. 하는 수 없이 안내인에게 경비를 1,000 달러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술을 몇 잔 마시더니 이 사람은 의외로 흔쾌히 “그럽시다. 1,000 달러로 합시다” 라고 대답하고 나와 악수를 했다. 나는 500 달러를 선금으로 줬고, 나머지는 취재가 끝난 뒤에 주기로 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뜬 눈으로 지샜다. 카메라 점검도하고, 취재 계획도 짜고, 필름도 충분히 챙기고, 입고 갈 옷도 지나치게 요란하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는 등 분주했다. 무엇보다도 그 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안내인을 만나기로 한 아침 6시에 나는 브레타뉴 호텔 로비에서 기다렸다. 두 시간이 흘렀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니까 이봉조가 오더니 “잊어버리고 아침 식사나 하자”고 나를 이끌었다. 이 마당에 밥이 들어가느냐고 신경질을 부렸지만 바보 짓을 한 나로서는 다른 대책이 없었다. 돈 날린 것도 아깝지만 기대가 무너진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약속시간보다 4시간 늦게 그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경비 책임자가 ‘목이 달아날까 봐 무섭다’며 말을 안 듣는다고 했다. 그는 200 달러를 내밀었다. 300 달러는 섭외하느라 썼고 이미 배도 빌려 놓았다고 했다. 그날 나는 그가 빌려 놓은 배를 타고 아테네를 끼고 도는 유람을 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허허’ 웃고 말았다.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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