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조총연맹(민노총)이 8일 '지도부 총사퇴'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노조 간부 성폭력 사태'의 파급력을 그만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노총이 이번 파문으로 불거진 계파간 갈등을 해결하고 대안없는 투쟁 방식의 변화를 꾀하지 않는 한 조합원과 국민의 신뢰를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과격 투쟁에 지친 탈퇴 러시
'과격 투쟁'과 '전투적 조합주의'는 1995년 창립 이후 민노총을 규정하는 키워드나 다름 없었다.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이 더욱 공고해지면서 민노총은 비판 여론에 따른 위상 추락을 감수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내부 응집력 약화는 민노총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다. 어느 순간부터 본부가 수립한 정책 목표와 투쟁 계획이 현장에 잘 먹혀들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령 민노총은 지난해 7월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파업 참여율은 14%에 불과했다. 그나마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의 참여가 없었다면 총파업은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민노총 탈퇴 움직임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2003년 1,332개에 달하던 민노총 가입 조합 수는 4년 만에 '반토막(690개)'이 났다. 2004년 현대중공업(1만8,000명)과 GS칼텍스(1,000명) 노조, 2006년 코오롱(800명) 노조 등 대규모 사업장들은 심각한 노사 분규를 겪은 뒤 민노총과 결별을 선언했다.
무산과 유회가 '전통'처럼 굳어진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 등 주요 내부 행사의 파행도 일반 노동자들이 민노총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기업-남성-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민노총의 경직된 조직 구조와 노조 관료주의는 파업 동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민노총이 노동 현장의 관심사에 집중하기 보다 노조 간부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 이슈들이 투쟁의 전면에 떠오르면서 노조원들의 불만이 팽배해해졌다"고 분석했다.
■ 투쟁의 덫에 걸린 민노총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은 2007년 2월 취임 일성으로 "습관적으로 맸던 빨간 머리띠를 풀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민노총은 화물연대 파업을 시작으로 건설기계노조, 금소노조 파업 등을 잇따라 강행했다. "촛불 정국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이 위원장의 언급에서 보듯 민노총의 파업은 정치적 의미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 위원장은 상대적으로 정부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국민파(온건파)에 속한다. 그런데도 정치 파업을 밀어 붙인데는 국민파 지도부가 강경 투쟁을 주문하는 중앙파(중도좌파), 현장파(좌파) 등 다른 정파들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2005년 2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참여를 둘러싸고 벌어진 난투극 사태는 정파간 갈등이라는 민노총의 고질적 병폐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김정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끊임없이 상대 정파를 흔드는 헤게모니 싸움에 지친 지도부가 어정쩡한 행보를 거듭하다 보니 투쟁의 덫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나누기 등 산적한 노동 현안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조합원들이 민노총에 염증을 느끼게 한 결정적 이유였다.
김 연구위원은 "노조는 도덕성이 생명인데 민노총은 최근 몇 년 사이 뇌물비리, 성폭력 등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도덕적 해이를 모두 보여줬다"며 "투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치열한 자기 반성을 통해 위기 타개의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전교조도 불똥 튀나
민노총 간부의 조합원 성폭력 파문이 전국교직원노조로 불똥이 튀고 있다.
전교조는 7,8일 이틀간 충북 충주에서 열린 '2009 전국 지회장ㆍ지부 집행부 연수'에서 비상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 최근 민노총의 성폭력 사태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성폭력 피해자가 소속 조합원으로 밝혀진 만큼 집행부가 관련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사건 전개 과정에서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 등을 따지기 위해서다.
전교조의 이런 결정은 피해자 측 대리인이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민노총뿐 아니라 피해자가 소속한 연맹의 위원장과 간부들도 압박을 가하는 등 2차 가해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전교조 홈페이지 등에는 진상규명과 함께 정진후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까지 나오는 등 의견 대립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교조는 5일 이 사건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해 왔으나 의혹이 확산되자 조기 수습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교조가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은 자칫 이번 사태에 발목이 잡힐 경우 1월 출범한 신임 집행부의 조직 장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엄민용 전교조 대변인은 "사건을 숨긴다는 인상을 주기보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해 책임 소재를 가리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장은 일단 8일 열린 회의에서 "2차 가해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사퇴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조사 결과 전교조의 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민노총에 이어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집행부 조기 사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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