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입 배급한 '플래툰'이 대박을 터트리고 있던 1987년 여름. 뉴욕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국 최대 영화사 중 하나인 '콜롬비아영화사'의 수석부사장 '케빈 하이슨'씨의 전화였다. 뉴욕에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싶으니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뉴욕 왕복 1등석 항공티켓이 도착했다. 영화법이 개정되고 국내영화계가 변화의 물결로 요동치던 시기였다. 나는 중요한 회의에 대비하여 뉴욕에서 유학했던 죽마지우를 통역으로 동행했다.
'케빈 하이슨'씨는 첫 인상부터 여느 비즈니스맨 같아 보이지 않았다. "먼 길을 와 주어 감사하다"며 내 손을 잡는 그는 마치 오랫동안 나를 지도해주던 문과대 지도교수 같았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내가 뉴욕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그는 차를 마시며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내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웃으며 편안히 이야기하자며 예약한 한국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미국영화가 한국에 직접 배급됩니다." 이어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콜롬비아영화사도 직접 배급합니다. 당신이 그 일을 맡아주십시오." 그는 계약 체결을 3년간 비밀로 하고 그 기간 배급하는 영화를 무상으로 나에게 주겠다고 하였다. 그 이후는 순수익의 35%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일확천금이다.' 통역을 하던 친구의 놀란 눈이 화등잔 만해져 케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계약서를 펼쳐보는 나 역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캐빈은 웃으며 그 동안 나를 지켜본 이야기를 들려줬다. 1967년 홍콩에서 배우생활 할 때부터, 감독으로서의 세계적 활동과 배급자로서 '플래툰'을 세계최초로 구매한 안목, 더군다나 전혀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검열을 통과시켜 한국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한 일 등등을 열거했다. 친구가 기뻐서 내 어깨를 쳤다. "야, 통역한 덕으로 캐딜락 한 대 사 주는 거지?" 한참을 묵묵히 있던 내가 웃으며 캐빈에게 말했다. "곤란합니다." 친구가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캐빈은 다정하게 말했다.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분을 3년간 비밀보장 하겠다는 겁니다." 나는 '수 천만달러'의 금방석에 앉기를 거절하고 있었다. 그는 빈손으로 일어나는 나에게 계약서를 쥐어주며 내 손을 다시 잡았다. "시간이 걸려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함께 하겠다는 답을."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서류를 내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수천만달러의 돈이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평생 만들 수 있다.' 캐빈은 나를 설득하기 위해 가끔 전화와 편지로 세계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냉전시대는 종식되고 국가 간의 장벽이 급격히 무너져 이제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다고 설득했다. 해가 바뀌며 미국영화 직배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극장들 사이에선 미국 직배영화를 받으려는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영화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가 직배된다면 쿼터제로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영화는 그야말로 1년에 수백 편씩 밀려드는 미국 영화 쓰나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었다. 극장은 극장대로, 영화인은 영화인대로 서로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영화인들이 마침내 거리로 뛰어나왔다. 영화인들의 절규가 흔들리던 내 가슴을 후려쳤다. '세상이 변해도 나는 변할 수 없다. 떼돈을 벌어 평생 속 편하게 영화감독을 할 수 있다 해도 한국영화계와 내 동료를 고통 속에 넣을 수는 없다. 그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케빈에게 나의 서명이 없는 계약서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짧은 인사의 글을 적었다. 나는 거리로 뛰어 나갔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달렸던 4.19,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달렸던 6.3의 서울 거리를 이제 직배 반대를 외치며 달렸다. "미국 영화 직배 반대한다!!" 놀란 극장주들은 올렸던 간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에 미친 몇 극장주가 영화인들의 절규를 외면한 채 전면전을 선포했다.
100여 명의 감독들이 전면에 나섰다. 명동에 있는 코리아극장과 신촌의 신영극장, 그리고 강남의 씨네하우스가 미국영화 직배에 동조하고 나섰다. 감독들은 우선 명동의 코리아극장을 습격했다. 첫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 의 예고 간판을 끌어내렸다. 이어 상영하고 있는 한국영화 <겨울나그네> 의 필름을 영사실로 들어가 압수하고 스크린을 찢어버렸다. 감독들은 노도같이 신촌으로 달려갔다. 신영극장의 스크린에 페인트를 부어버렸다. 두 극장은 겁에 질려 문을 걸어 잠갔다. 남은 곳은 씨네하우스였다. 영화인들의 시위가 거칠어지자 경찰이 나서기 시작했다. 영화인들은 경찰의 저지가 시작되자 잠시 휴식기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씨네하우스에서 <위험한 정사> 의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험한> 겨울나그네> 위험한>
영화인들은 특단의 조치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극장 안에 뱀을 풀어 관객이 놀라서라도 돌아서게 하려 했다. 소문만 나도 효과는 엄청날 것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피맺힌 영화인들의 호소를 외면하였다. 마침내 영화를 보다가 뱀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사회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확대시켰고 한국정부도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검찰이 영화인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영화인들은 검사 앞에서 '다시는 미국영화 직배 반대시위를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귀가조치 되었다.
나는 거짓말을 못 하겠다고 버텼다. 다 돌아가고 남은 건 젊은 검사와 나, 단 둘. 검사는 다시 하더라도 안 하겠다고 쓰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또 반대시위를 하겠다"고 하였다. 창 밖으로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검사가 웃으며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쓰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또 미국영화 직배 반대시위를 할 것입니다"라고 큰 글씨로 썼다. 검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고 하셨습니다." 그의 손을 잡자 땀이 꽉 찬 온기와 힘이 느껴졌다. 이슬이 내린 새벽의 검찰 청사를 걸어 내려오며 케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전, 그가 암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문득 그에게 보낸 마지막 글이 생각났다.
'고맙다, 캐빈. 나는 세계 영화를 위하여, 한국 영화를 지키겠다.'
과연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 영화인인가? 이 글을 쓰며 그 때 그가 줬던 '황금알'을 받았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어본다. 요즘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어 돈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으니 말이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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