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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민이 우매하다는 '위험한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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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민이 우매하다는 '위험한 전제'

입력
2009.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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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강호순의 피의자로서의 인권과 무죄추정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피의자의 유죄가 재판을 통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흉악범'이라고 예단하여 호송시 또는 현장검증시 얼굴을 강제로 공개하거나 그 공개를 법제화하는 것은 무죄추정 원칙에 반한다. 일반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얼굴을 숨기고 다닐 수 있다면 무죄로 추정되는 피의자도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저지른 범죄의 경중과도 관계가 없다. 일반인들은 시위장소에 복면을 쓰고 나타날 권리도 있고 인터넷에 익명으로 글을 올릴 권리도 있다. 이러한 권리는 피의자에게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강제적 얼굴공개'와 '이미 공개된 얼굴사진의 공유'는 구분되어야 한다. 피의자라고 해서 일반인보다 더 적은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니지만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찍은 얼굴 사진을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해 놓은 후에 갑자기 범죄피의자가 되었다고 해서 타인들이 그 사진을 돌려보는 것을 금지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일반 국민들은 야구경기를 보러 갔다가, 또는 성묘를 갔다가 허락없이 자신의 얼굴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은 모두 허락없이 얼굴이 보도된다. 혹자는 성묘갔던 사람으로서 얼굴이 나오는 것과 달리 범죄 피의자로서 얼굴이 나오는 것은 명예를 훼손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유일하게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해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진실이 누구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공개를 금지하는 법이 보호하는 가치는 도대체 '명예'인가'위선'인가. 타인이 자신에 대해 좋은 사실만을 알고 있도록 하여 얻어낸'좋은 평판'을 법이 보호해주는 국가에서 자라난 아이들은'명예'와 '위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오염된 과자, 비위생적 급식을 하는 학교, 환자를 학대하는 병원 등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국민들은 그 업체나 기관의 실명을 몰라 두려움에 떨었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선량한 업체나 기관들은 억울하게 피해를 보거나 의심을 받아야 했다. 국민들은 합법적으로 얻은 진실된 정보를 공유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정보가 누군가의 얼굴이라고 특별히 조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혹자는 우리나라는 유죄율이 높아서(95%) 일반 국민들이 '피의자'를 '범죄자'와 동일시하여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해도 '범죄자의 얼굴'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명예가 부당하게 훼손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대부분 유죄율이 매우 높고(미국 85%) 도리어 우리나라의 유죄율에는'무죄를 대신하는 집행유예'도 포함되어 있다. 단지 차이는 우리나라 법은 국민들이'피의자'와 '범죄자'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는 반면 다른 선진국들의 법은 국민들의 소양을 신뢰하여'피의자'의 신원공개를 허용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소양을 믿지 못하는 법리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다양한 법규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미네르바'박대성씨가 기소된 전기통신기본법 47조은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우매한' 국민들이 속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검찰은 실제로 정부환율조치에 대한 박씨의 부정확한 아고라 글에 '속아' 환거래를 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박씨에게 지우려 하고 있다.

또 검찰은 특정 일간 신문들의 광고주들에게 불매전화를 하도록 선동한 사람들을 기소했다.'우매한' 국민들은 다음 카페의 글만으로도 쉽게 설득된다고 보는 것이다.'우매한 국민'은 욕설을 당해도 모를 수 있으니 국가가 알아서 처벌해주자는 생각이 반의사불벌죄인 사이버모욕죄 제정론에 깔려 있다. 민족성이 '우매하다'고 보고 이를 이유로 구태를 정당화하는 '대한민국 예외론'은 종식될 때가 됐다.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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