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의 미륵사지가 최근 큰 화제가 됐다. 지난달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 봉안기 때문이다. 백제의 새로운 역사가 밝혀졌다는 기쁨과 함께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지워야 하는 아쉬움도 함께 나눠야 했다.
충북의 월악산 자락에도 같은 이름의 미륵사지가 있다. 이곳도 익산의 것과 같이 터만 남은 폐사지다. 익산의 절터가 도회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충주의 미륵사지는 심심산골 외진 곳에 틀어박혀 있다.
차가운 골바람 부는 미륵사지에는 석불과 석탑, 석등, 귀부 등이 남아 천 년 전 옛 영화를 전한다. 이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늘재다. 문경과 충주를 잇던 고갯길로 우리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는 신라 8대왕 아달라왕이 156년에 북진을 위해 뚫었다고 적고 있다.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하던 초기 신라 사람들이 영토 확장을 위해 개척한 옛길 ‘계립령’이 바로 하늘재다. 삼국사기>
이름만 봐선 하늘과 맞닿은 고개 같지만, 실제로는 해발 고도 525m로 그리 높지 않다. 하늘재는 지리적 요충지. 이곳을 통해 신라는 중원을 꿈꿨고 고구려와 백제는 남녘 바다를 도모했다. 세력 다툼의 접점인 탓에 싸움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재는 고려시대에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교통로로 더욱 발전한다. 주변에 미륵사, 관음사 등 대형 사찰이 세워지고 큰 역원(驛院)과 함께 산성들도 축성된다.
문경시 문경읍에서 하늘재가 만나는 마을은 관음사가 있던 관음리다. 고개 너머 충주 땅은 미륵사지가 있는 미륵리다. 하늘재는 이렇게 현세의 고통을 정화하는 관음 세상과, 내세의 소망을 모으는 미륵 세상을 잇고 있다.
조선 들어 문경새재가 열리면서 하늘재는 그 효용이 떨어져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거대한 사찰도, 그 옆의 커다란 고려 역원도 바닥의 석물만 남은 채 스러져갔다.
지금 인적 뜸한 미륵사지엔 키가 10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지키고 서 있다. 1개의 돌로 조각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 덩어리 6개를 탑처럼 쌓아 올려 조성한 석불이다. 부드러운 미소의 석불도 볼거리지만 석불이 들어앉은 돌집이 이색적이다. 석불은 ㄷ자 모양으로 앞이 터진 돌집 한복판에 길쭉하게 솟아 있다. 경주의 석굴암처럼 석굴 안에 석불을 들어앉힌 모습이다. 6m 높이로 석축을 쌓아 석불을 에워싸고 목조로 둥그런 지붕을 만들어 얹었던 ‘지상의 석굴암’이다. 지금은 석불과 석축만 남아 있다.
누가 쌓은 것일까. 지방 호족이 세를 과시하기 위해 경주의 석굴암을 흉내낸 게 아닐까 한다. 고도로 세련된 경주의 석굴암에 비하면 덩치만 커다란 엉성한 석불. 한마디로 촌스럽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정감있고 친근하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남쪽을 향해 놓이는 것과 달리, 이 석불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애틋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이 석불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세웠다고 전한다. 석불은 마의태자 자화상이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덕주공주 상인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는 것. 하지만 아닌 것 같다. 패망한 나라의 왕자와 공주에게 그런 여유가 있었을까.
석불의 뒤편에 서서 그 시선을 따라가면 왜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치맛자락 펄럭이는 듯한 월악의 고운 산자락들. 정면으로 뻗은 월악 송계계곡이 심심산골 한복판에 시원하게 시야를 뚫어낸다. 석불도 뒤편의 꽉 막힌 산자락을 보고 면벽수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석불과 딱 어울리는 파트너로 고졸한 5층석탑이 폐사지 중앙에 솟아 있고, 작은 내를 건너면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는 동그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미륵사지의 또 다른 볼거리는 거대한 돌거북이다. 길이 6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이다. 폐사지 바로 옆에는 고려 때 길손이 묵던 커다란 역원의 흔적인 미륵대원 터가 남아 있다. 이 옆으로 해서 오르면 하늘재다.
미륵사지 석불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이전의 사찰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이 쉽지 않다. 눈을 떴다. 폐사지 자체만으로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바로 옆 이상한 모양의 집을 짓고 들어선 ‘미륵 세계사’란 이름의 절이 눈에 거슬린다. 1,000년의 시간을 보내고 남은 폐사지. 이곳은 그 자체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사찰, 미륵불의 세상이다.
■ 여행수첩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빠르다. 괴산IC에서 나와 수안보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수안보온천단지에서 597번 지방도로를 타고 송계계곡 쪽으로 달리면 미륵사지 입구가 나온다. 미륵사지를 둘러보느라 추워진 몸은 수안보온천이나 앙성온천에서 푹 녹일 수 있다. 충주시청 문화관광과 (043)850-6701
충주=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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