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무인 곽원갑 고향 난허진, 징우진으로 개명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무인 곽원갑 고향 난허진, 징우진으로 개명

입력
2009.02.06 00:00
0 0

쿵푸 스타 리샤오룽(李小龍)의 <정무문> 과 리롄제(李連杰)의 <무인 곽원갑> 으로 더 유명해진 중국 근대 무도인 곽원갑(霍元甲)의 고향 지명이 그가 창시한 정무(精武) 체육회를 따서 개명됐다. 혼란했던 청조 말 서세동점의 물결에 맞서 활약한 공로로 '애국 무술가'로 불리는 곽원갑이 태어나 자란 톈진(天津) 직할시 시칭(西靑)구 난허(南河)진이 그를 기려 '징우(精武)'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민일보와 연합조보는 3일 '징우'진이란 새 현판을 다는 행사가 2일 열렸다고 보도했다. 앞서 당국은 곽원갑의 생가를 복원해 개방하고 그의 묘소도 새로 단장하는 한편 '곽원갑 무술학교'도 세웠다. 올 들어 시 중심가에 문화교류 센터의 건립도 서두르고 있다.

곽원갑은 1868년 물산이 풍부하고 상무 분위기가 넘치는 난허진에서 무술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장을 열고 선조대부터 계승된 절학을 전수해 명성이 텐진을 넘어 베이징까지 알려졌다. 12살 때부터 집안의 '곽가권 절기' 비종권(秘宗拳)를 배운 곽원갑은 이를 더욱 발전시킨 미종권(迷踪拳)을 창안해 연마한 뒤 협객으로 활약하면서 톈진과 상하이에서 러시아와 영국 등 동서양의 역사, 무도인들과 대전을 펼쳐 이겼다. 그의 쾌거는 당시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치욕을 뒤집어 쓰고 있던 중국의 국민에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그는 1910년 6월 상하이에서 정무체육회를 창설, 중국 전통무술을 발전시키는데 절대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곽원갑은 정무문으로도 불리는 정무체육회를 만든지 불과 3개월 뒤 급사했다. 곽원갑은 일본유도회 회장이 이끌고 온 10명의 고수와 제자들을 대련시켜 이긴 후 일본측이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독극물에 중독돼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애제자인 천전(陳眞)이 사부의 복수에 나선다는 스토리가 리샤오룽 주연으로 1970년대 초 영화화돼 크게 히트하기도 했지만 실제론 곽원갑 제자 가운데는 천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은 정무체육회 창시를 높이 평가, '상무정신(尙武精神)'이란 친필 휘호를 내리고 정무체육회 역사를 서술한 '정무본기(精武本紀)'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정무체육회는 현재 세계 80여 곳의 지부에 40만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텐진시 당국은 곽원갑의 출생지를 유명 무술인 황비홍(黃飛鴻)의 고향인 남부 광둥(廣東)성 포산(佛山)처럼 중국 전통무술의 '메카'로 조성할 계획이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