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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로 여는 아침] 과일가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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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로 여는 아침] 과일가게 앞에서

입력
2009.02.06 00:00
0 0

박재삼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겨울 밤골목, 아직도 불이 환히 켜져있는 과일가게, 투명한 비닐천막 저편에 쌓여있는 과일들을 무작정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나는 가끔 과일가게는 천국의 재현이라는 생각을 한다. 달고도 신 향기, 붉고, 노랗고, 푸른 빛깔들 앞에서 삶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화려해지고 달콤해진다. 밤골목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설레임의 바람에 취하여 모든 것에 희망이 보이고 초라하던 것들이 따뜻한 모습으로 뒤바뀐다. 골목에 쌓여있는 연탄재도 다정해 보이고 그 옆에 버려진 밥찌꺼기도 아련해 보인다.

과일 몇 개를 골라 집으로 돌아와서 둥근 그것들을(열매들은 거의 다 둥글다, 달걀도 씨앗도 그렇다. 생명의 가장 완벽한 형태!) 식탁 위에 올려두고 텔레비전을 켜두고 얼마간 가만히 앉아있는다.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가 나오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당하는 며느리가 화면 안에서 통곡을 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어쩐지 마음은 환해지는 느낌. 우리는 저 과일들처럼 완벽하지 않다. 당신도 나도, 불완전한 삶을 짐처럼 낑낑 지고 메고 오늘도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혹 당신은 남몰래 마음 속에만 숨겨두고 가끔 곁눈질로 바라보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연분홍의 사랑에 속을 끓이며 슬그머니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저 시의 마음으로 밤골목의 과일가게 앞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부럽다. 과일처럼 완벽한 마음의 사랑을 당신은 지니고 있으므로.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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