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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4> 아테네서 당한 대낮의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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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4> 아테네서 당한 대낮의 사기극

입력
2009.02.0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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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진짜로 짜증나는 일이다. 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대충 보면 두 가지 실수가 포착된다. 하나는 남을 너무 믿는 바보스러움이고, 또 하나는 지나친 욕심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사기를 며칠 사이에 두 번씩이나 당한 일이 있다.

그리스에서 그야말로 보기 좋게 당한 일인데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당했다. 아주 창피한 이야기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니까 이런 것도 밝혀 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올림픽의 발상지이며, 세계역사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이 나라를 나는 1971년에 갔다.

그 무렵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돈이 있어도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라서 나는 매우 가슴이 설??? 7월 초라서 무척 더웠는데 그리스 국가정책은 낮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도서관과 병원 등 공공기관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게 했다. 일종의 ‘시에스타(점심 뒤에 자는 낮잠)’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쇼핑센터나 식당도 예외는 아니다. 법으로 철시를 명했으니 가게 문을 모두 닫아야 한다. 따라서 그 시간에 국내인들은 바닷가에 있는 세컨드 하우스에 가서 쉬든지, 아니면 집에서 낮잠을 자든지 해야 한다.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이 시간에 외국 관광객들은 아테네 시내의 문화유산을 구경 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작곡가 이봉조와 함께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에 올라가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유적을 구경했다. 그리고 시내로 내려오니 오후 3시께가 되었다. 그 날은 가요제 연습도 없는 날이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구경을 더하기로 하고 시내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던 곳으로 다시 와서 버스를 내렸다. 아테네 시청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니까 구 도심지가 나왔다. 관광버스도 많이 서있고, 주변이 화려하게 보였다.

목이 말라서 맥주라도 한잔 하려고 기웃거려보니 모든 카페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이리저리 다니고 있을 때 어떤 키가 작달막한 40대 남자 하나가 우리한테로 오더니 대뜸 영어로 “Are You from Korea” 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놀랐지만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리스에는 한국 사람이 전국에 한명 밖에 없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에 “일본인이냐”고 물어보고, 그 다음에 “중국인이냐” 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하면 “그럼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물어 보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대뜸 처음부터 “한국에서 왔느냐” 라고 하니까 호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코리아에서 왔다” 라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오케이, 아이 노우 영등포, 인천”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놀랐다. 이역 멀리 에게해(지중해의 동부) 연안에 와서 영등포를 아는 사람을 만나니 신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인 듯했다. 반갑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우리를 번갈아 포옹하더니만 “지금 모든 식당이나 커피숍이 쉬는 시간이니까, 내가 아는 바에 가서 칵테일을 한잔씩 하자”며 그는 우리를 근처 지하에 있는 식당 비슷한 카페로 안내 했다.

느낌도 이상하고, 또 아무리 영등포를 안다고 해도 처음 본 사람한테 술을 얻어 마시는 것도 편하지 않고 해서 나는 이봉조의 팔을 끌고 딴 데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이봉조는 “괘않다. 얻어 묵지 말고 한잔 사면 되지 않겠나. 따라 들어가자” 라며 내 팔을 끌었다. “바가지 쓰면 어쩌려고.” 내가 그냥 가자고 말려도 만사에 긍정적인 그는 “써봐야 얼매나 쓰겄노. 그냥 들어가자” 라며 그 키 작은 남자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래 까짓거 맥주 한잔 마시고 바로 나오지 뭐. 하는 생각으로 같이 들어갔다.

세계 어느 나라고 간에 식당이나 카페에서 테이블에 앉지 않고, 스탠드바에서 맥주를 마시면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어설프게 테이블에 앉으면 자칫 큰돈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바에 서서 바텐더에게 맥주를 시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에선지 웨이트리스 5명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가 있는 바에 서서 미리 준비한듯한 칵테일을 한잔씩 물 마시듯이 홀짝 마셔 버렸다. 이봉조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곤 마시던 맥주잔을 잽싸게 내려놓고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미처 맥주 한잔을 비우기도 전이다. 바텐더가 맥주를 갖다 주고 우리가 마시려다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전체로 걸린 시간이 3분도 채 안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내야 될 돈은 자그마치 미화 520달러라고 했다.

5명의 웨이트리스들이 마신 것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옆을 쳐다보니 이미 웨이트리스들은 없어졌고, 우리를 안내한 “영등포”어쩌구 하던 녀석도 벌써 사라졌을 뿐이고, 어이가 없어진 우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1971년의 520달러는 오늘날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이 큰돈이다.

경찰을 부를까 하다가, 술 값 바가지 썼다고 타국에서 경찰을 부르는 것은 자칫하면 또 다른 부작용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바가지 차원이 아니라 완전 사기였다. 분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바텐더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그리고 술값은 딱 절반인 260달러를 냈다. 발길로 얻어맞은 바텐더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것을 나는 알았다. 5시 이전의 영업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봉조와 나는 정말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초대한 그리스 정부에 정식 항의를 하려했으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만 바보 취급당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 거리며 애매한 엘리베이터만 주먹으로 쾅쾅 쳐댔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 정말로 큰 특종을 한 건 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기자들에게 특종은 목숨이다. 내가 오기 어려운 이곳 그리스의 아테네까지 왔는데 코앞에 있는 재클린 케네디와 오나시스를 인터뷰 안하고 집으로 갈 수는 없다는 욕심이 생겨서 그 섭외를 해 놓은 상태였다.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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