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중순까지만 해도 의사들에게 은행은 마치 개인지갑과도 같았다. 그들이 의사 자격증만 내보이면 은행은 아무 담보 없이 수억 원을 빌려주고, 심지어 온갖 혜택으로 가득한 의사 전용 대출상품을 내놓으면서 '의사 모시기'에 열을 올렸다. 의사들은 이처럼 쉽게 빌린 은행 돈으로 개인병원을 내고 의료장비를 사들였다.
그러나 경기한파가 불어 닥치면서 은행권의 최우량 고객인 의사들도 타격을 받고 있다. 은행들이 경기 침체를 반영해 의사들에게 빌려주는 돈의 한도를 축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자본 없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었던 의사들의 전성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의사도 해고되고 병원이 문을 닫는'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외면 받는 VIP 고객들
2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씨티은행은 최근 의사를 대상으로 한 신용대출 상품인 '닥터론'의 한도를 기존 5억 원에서 3억5,000만 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신한은행은 의사 신용대출 한도(교수 기준)를 2억 원에서 1억2,000만 원으로, 하나은행은 개업을 앞둔 의사에 대한 신용대출 한도를 3억 원에서 2억 원으로 낮췄다. 또한 의사들에 대한 신용대출 가산금리도 각 은행별로 0.5~1%포인트 가량 인상했다.
변호사를 비롯한 다른 전문직이나 공무원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신한은행은 변호사 등 전문직 대출 상품인 'TOPS전문직 우대론'의 한도를 3억 원에서 2억5,000만 원으로, 공무원과 우량 직장인 대출상품인 '엘리트론' 한도를 1억 원에서 5,000만 원으로 내렸다. 하나은행도 최고 2억5,000만 원인 개업 변호사 대출한도의 축소를 검토하고 있다.
은행이 의사를 외면한 이유는
최근 시중은행들이 신용도 1위인 의사의 신용대출 한도를 잇따라 축소한 이유는 경기악화로 이들의 대출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의 경우 신용등급이 우량한 직장인 신용대출 연체율은 작년 3분기 0.57%에서 작년 말 0.6%로 0.03%포인트 상승했다. 특히 의사들의 신용대출 연체율은 0.6%에서 0.8%로 0.2%포인트나 뛰었다.
A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빚을 내 규모를 키우거나 새로 설립한 병원들 중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병원들이 크게 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의사들의 신규 대출 잣대가 보다 엄격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B은행 관계자도 "경기가 어려워지면 자영업자들이 가장 타격을 받는다"며 "초우량 고객인 의사들 중에 신용불량자가 발생할 정도로 시장이 악화해 어쩔 수 없이 대출 한도를 축소했다"고 말했다.
실제 의료시장에서는 경기 침체로 중소병원의 폐업이 속출하고 직장을 잃는 의사들이 늘고 있다고 의료업계 종사자들은 전했다.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한 병원장은 "작년 하반기부터 환자 수가 눈에 띄게 줄어 결국 의사 한 명을 내보냈다"며 "경영난으로 대출이자 갚기도 어려워 폐업을 고민하거나 건물을 매물로 내놓은 병원들이 주위에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한 시중은행이 작성한 '의료시장 동향'보고서(비공개)에 따르면 작년 중소병원의 폐업률은 8%를 기록했다. 또 국내 의사 수는 1988년 3만6,845명에서 2007년 9만1,475명으로 250% 증가한 반면, 의사 1인당 인구 수는 같은 기간 1,141명에서 530명으로 급감했다. 이 보고서는 "대형병원이 대도시 중심으로 몰리면서 수도권 지역의 1, 2차 의료기관들의 몰락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며, 여기에 외국 의료자본까지 들어오면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의사의 개인신용대출을 축소한 데 이어 이들의 기업대출에 대해서도 심사를 강화하기로 했다. 은행 관계자는 "지금까지 의사라고 하면 무조건 무담보로 대출해줬으나 앞으로는 일반 고객이나 기업처럼 영업력, 매출액, 시장점유율 등을 고려해 심사하고, 진료과목 별로도 차별적인 대출관리를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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