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경찰에 몸 담아 바다와 함께한 지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함정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해상경비 업무 중 EEZ경비를 맡아 특히 불법 중국어선 검거조로 맹활약했다. 육상에서는 여객선 유도선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안전관리책임자로 주말과 공휴일도 잊어버린 채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 왔다. 남들 다 가는 휴가도 잊은 채….
그러면서 문득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때면 그 동안 나 자신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되새기며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특히 우리 3남매에게 늘 아빠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같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려는데 둘째 아들 녀석이 내 앞에 다가와서는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의 사랑이 모자란 아이처럼. 겉봉투에는 발신인이 충남 태안군 교육청으로 되어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태안군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부자캠프' 참가 신청서였다. 나는 잠시 안내문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우리 아들 한섭이는 분명히 아빠는 이번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가실 거란 걸 알고는 봉투만 내밀고 말 한마디 없이 제방으로 들어갔으리라.'
그 동안 아이들에게 별달리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하던 차에 그 안내문은 아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서 선뜻 부자캠프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섭아, 이번 부자캠프에 아빠랑 같이 가자" 라고 말을 했더니 한섭이는 먹던 밥 숫가락을 멈추고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무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부자캠프 참가 당일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고 잠에서 일어나 보니 아들 녀석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벌써 준비를 다 마치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섬주섬 속옷가지며 생활용품들을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아들과 함께 나란히 차에 올라 만리포 해수욕장에 있는 홍익대 수련원으로 향했다. 수련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플래카드가 우리 부자를 반겼다. '아빠랑 아들이 함께하는 1박2일 부자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참가한 인원은 총 20팀으로 생각보다 많았다.
잠시 후 소강당에 모여 인원 파악을 마치고 각자의 숙소를 배정 받았다. 숙소에서 간편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소강당에 모여 사회자로부터 취지와 주의사항을 듣고 각자 소개하는 순서를 가졌다. 그 뒤 참가자들은 4개조로 나누어 게임을 하면서 열심히 뛰고 굴렸다. 우리 부자도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젖은 줄도 모르고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부자의 정을 한껏 나누고 있었다.
게임을 마친 뒤에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 소회의실에 모여 '가족 희망가훈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한섭이와 나는 우리집 가훈을 '항상 최선을 다하자'로 정했다. 우리는 하얀 도화지 위에 풀로 글씨를 쓴 뒤 색깔 입힌 모래를 그 위에 뿌려 작품을 꾸몄다. 멋진 우리집 가훈이 탄생했다
잠시 후 사회자의 아나운스먼트가 이어졌다. "자, 지금부터는 '사랑의 발 씻기' 시간입니다. 먼저 자녀분들은 앞에 나와서 순서대로 세숫대야를 들고 물을 받아서 아버지 앞에 앉기 바랍니다. 아버님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계시고 자녀분들은 아버지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발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아버님은 우리를 남들 못지않게 키우시기 위해 열심히 사셨습니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이고 발바닥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살이 생기셔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이어지면서 우리 아들 한섭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우리 아들도 다 자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찡해졌다.
이제 다시 위치를 바꾸어 한섭이를 의자에 앉힌 뒤 신발을 벗기고 양말도 벗긴 후 물에 조심스럽게 아이의 발을 넣었다. 왼손으로 발을 들고 오른손으로 물을 적시며 천천히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섭이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내 머리 위를 적시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분여의 시간이 흐르자 한섭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발을 다 씻긴 후에도 한섭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한섭이를 품에 꼭 안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이렇게 착하고 소중한 아들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사랑의 발 씻기'를 마친 뒤 다음 프로그램은 '귀신체험 시간'이었다. 아들과 둘이 만리포 산속 코스를 돌아야 한다. 무서움을 많이 타는 한섭이가 걱정이 된 나는 "한섭아, 무서우면 안 해도 돼"라며 걱정을 했더니 "아냐, 아빠랑 같이 가면 할 수 있어"라고 씩씩하게 자신감을 보였다. 기다림 끝에 이제 우리가 출발 할 시간, 아들과 나는 두 손을 꼭 잡고 목적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이동을 했다. 중간 중간에 미리 숨어있던 분장 귀신이 튀어나오고, 나무 위에서 갑자기 물건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 부자는 깜짝깜짝 놀라기는 했어도 무난히 코스를 완주했다.
이제 취침시간. 나는 방 한가운데 이불을 편 뒤 아들을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섭이는 피곤했던지 누운 지 10분도 채 안돼 잠이 들었다. 잠자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그 동안 직장 일을 핑계 삼아 아이들에게 많이 무심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산책을 하고 이어 아침식사를 한 뒤 참가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며 1박2일간의 부자캠프를 마쳤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아들과 아빠가 하나 됐던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부자캠프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신 태안교육청 관계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충남 태안 변상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